등록 2008.05.29 16:14수정 2008.05.2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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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고 뜨락이 비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시름이 깊다고 풀이 더디 자라는 것도 아니다. 구봉화 진 자리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온갖 풀과 나무들이 서로 시새움하며 발돋움한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는 감자는 무성하고 옥수수는 새싹이 귀엽다. 지주대에 의지한 고추는 하얀 꽃을 피우고 가지, 오이, 수박, 참외는 키를 키우기에 바쁘다. 한쪽 텃밭에서는 지난 겨울을 넘긴 상추가 주체할 수 없이 자라고, 옮겨 놓은 케일과 쑥갓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자두와 매실은 날마다 다르게 살이 오르고 오디는 벌써 익으려 한다. 한 달 전 심었던 야콘은 거의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1주일 전 밭으로 옮긴 철쭉 묘목은 많은 수가 아무래도 미덥지 않다.
철쭉 묘목은 작년 여름 꺾꽂이하여 비닐하우스 안에서 키운 것들이다. 약 3천주 꺾꽂이하였으나 관리 소홀로 절반쯤 잃었던 것인데 이제 다시 또 많은 묘목들을 잃을 것만 같다. 전문가들도 70%를 살리기 어렵다는 말이 위안이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가. 급히 물을 공급하는 호스를 더 구입하여 물을 주고 있지만 볼수록 안타까움이 크다.
옛날 고향에서는 고구마 순을 "심는다"고 하지 않고 "놓는다"고 했다.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놓는다"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지난 일요일, 아내는 고구마를 놓았다. 고구마는 맨 땅에 심으면 밑이 잘 든다는 마을 할머니들의 조언에 아내는 애써 두둑을 덮어 놓은 비닐을 벗겨내고 그 자리에 고구마 순을 놓았다.
고구마 순도 아내가 직접 기른 것이다. 이른 봄, 이웃 할머니에게 호박고구마 종자를 얻어 비닐하우스 안에 묘판을 만들어 심었던 것인데 의외로 마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잘 자라 오늘 1차로 베어 밭에 옮긴 것이다.
생명이 분화되어 개체를 갖춘 다른 생명으로 자리잡는 것을 보면 신기한 점이 많다. 생명을 복제 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에 앞서 식물이 먼저 실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철쭉의 여린 가지가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우는 과정이나 고구마순이 땅 속으로 뻗어 자신의 후손을 주렁주렁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단순히 과학으로 해명되지 않은 자연의 오묘한 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아내는 바쁘다. 금년에 넓힌 잔디밭에는 벌써 풀이 무성하고 고추밭, 상추밭에서도 풀 때문에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들린다. 꽃길의 철쭉 아래 숨은 풀도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다.
종일 뜨락을 헤매다 밤이면 지쳐 누웠던 아내는 다시 아침이면 오늘 할 일을 되새긴다. 풀이 없어지지 않는 한 힘든 김매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그렇게 힘들기만 하면 우리는 벌써 농사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곧 따야할 오디와 매실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의 피로를 잊는다. 살 오른 자두가 붉게 익을 날을 기다리고, 이어서 감자도 캐야하고 고추를 따고 오이와 수박, 참외를 맛볼 생각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여름의 끝 무렵에는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 수 있을 것이다. 고추가 붉어질 무렵에는 김장 배추와 무를 심을 것이다. 또 그 사이사이 상추와 열무며 알타리무를 가꾸는 일은 덤으로 해야 할 것이다. 붉은 고추를 말리고 고구마와 야콘을 캐버리면 아내의 금년 농사는 대충 끝날 것이다. 마음 밭을 일구는 아내의 마음 농사도 마무리될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점점 좋아지는 아내를 본다. 이따금 좋아하는 여행을 못하는 점을 아쉬워하면서도 우리가 심고 가꾸는 작물들의 성장을 놓치지 않으려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자신의 병을 이겨내고 있다.
요즘 아내는 고구마와 야콘을 캐는 날에는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작은 축제를 열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럴 때는 세월 따라 늙는다는 생각을 잊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아내를 보는 일은 기쁨이다. 나 역시 주말에는 물론 주중에도 퇴근 후에도 김매기를 하고 잔디를 깎고 돌을 주워 장독대를 만드는 일도 한다. 장독대가 완성되면 정말 장을 띄우고 된장을 담을 항아리를 줄 세울 작정이다.
기름값이 오르고 덩달아 모든 물가는 뜀박질한다. 국회의 임기가 바뀌는 정치의 공백기다.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뜨거운데 정부는 기어코 고시를 감행하려한다.
국민들에게 송구스럽다고 하면서도 국민이 원하는 재협상을 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태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우리가 대통령 복은 지지리 없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지난날 경찰에 연행되었던 일들이 기억나고 누군가에게 미안한 생각도 든다. 국민을 섬기겠다고 하면서 국민이 무섭지 않은 대통령이다. 그런 대통령을 나는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농작물이라면 병든 것은 뽑아내고 다시 심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는 노릇. 이 상태로 5년 동안 대통령 복 없음을 한탄하고 죽어갈 국민은 또 얼마나 될까? 아내를 따라 마음 밭이나 일구자고 하면서도 자꾸 뒤돌아 봐지는 오후다.
덧붙이는 글 | 촛불 든 젊은이들을 외면할 수 없기에 글쓰기는 어렵기만 하다. 걱정하고 분노하면서 젊은이들을 마음으로 성원한다.
2008.05.29 16:14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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