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명사 관음전. 연두색으로 칠한 띠살창이 무척 소박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안병기
성의 동쪽엔 꽤나 너른 평지가 있다. 평지로 내려서자 보명사라는 아주 소박한 절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러고 보면 황화산성은 공주 공산성과 너무나 흡사하게 생겼다. 물론 크기야 훨씬 작긴 하지만. 서북·서남쪽이 높은 지형도 그렇거니와 동쪽 평지에 절이 있는 점, 궁터가 있다는 점도 같다. 석축이 아닌 토축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절 주변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절 속 같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다. 논산문화원 홈페이지 자료는 "보명사는 1934년에 창건하였다"라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신앙 관음기도법>(김현준 저·도서출판 효림 간)이라는 책 속에는 일제 말 지명이라는 스님이 등화동에 사는 강태희라는 분을 찾아와 강씨 문중 산에 보명사를 짓도록 해준 것에 감사를 드린 사실이 서술돼 있다.
그는 선대에는 한 해에 수천 석을 추수하던 집안이었으나 차츰 몰락하여 산비탈의 오두막을 빌려 살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깊은 병을 앓기까지 했다. 스님은 강태희라는 분에게 병을 낫기 위한 방편으로 관음 기도를 드릴 것을 권한다. 이로 미루어 이 절을 지은 사람이 지명 스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무예에 출중했던 을리나라는 은진 담노의 딸이 목판을 맨 채 쓰러져 있던 스님을 구해 주었는데 그 스님의 말에 따라 이곳에다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리다가 죽었다는 이 지방에 전해오는 전설로 미루어 절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는데 잠시 폐사를 겪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곳은 단순히 그런 전설의 땅으로만 남을 수 없는 땅이다. 1894년 11월 15일, 이곳에선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쫓기던 동학농민군이 숨돌릴 새 없이 추격해 온 일본군·관군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다.
우금치에서 쫓겨온 농민군과 공주 전투를 지원하려고 달려오다 패배 소식을 듣게 된 여산 접주 최난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천여 명은 힘을 합쳐 밀려드는 적에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막강한 일군의 화력을 당해 낼 수 없었던 농민군은 마침내 이곳에서조차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외세 배척을 외치며 기세 좋게 출발했던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보명사 뒤편에는 아름답고 푸른 대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삐죽삐죽 솟은 대나무들이 마치 그 당시 농민군들이 들고 있던 죽창 같다. 푸른 대숲에서 솔솔 비극의 냄새가 풍겨오는 듯하다. 광주의 시인 문병란의 시 '죽순밭에서'가 떠오른다.
죽순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밭에는 낭자히 고인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올리는 대나무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 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 소리 - 문병란 시 '죽순밭에서' 일부 감상을 접고 절을 나와서 다시 성곽 길로 접어들려던 찰나. 노승 한 분이 요사의 문을 열고 빠끔이 내다본다. 합장으로 인사드리고 나서 잠시 절의 역사라든가 동학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스님은 동학군 이야기나 의자왕의 궁이었다는 성의 역사에 대해 매우 해박하다.
"어찌 그리 잘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에 오래 있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노라"고 자신을 낮춘다. 스님은 이 절집의 역사가 백 년쯤 되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어디서 득도하셨느냐?"고 여쭈었더니 '해인사 중암에서 지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노라"고 대답하신다.
지월 스님(1911∼1973)은 해인총림에서 '주리반특가'라 불리시던 분이다. 부처의 여러 제자 중 가장 둔하고 어리석었던 주리반특가. 그러나 그는 묵묵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십륙아라한 중 한 명이 되었다. 서슬 퍼런 선기나 출중한 면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갈고 닦은 생애가 닮았다 해서 '주리반특가'라 했던 것이다. "법명이라도 알려주시라"고 했더니 그냥 "보명사 스님이라 불러달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