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민종원
왜 아무도 그분들이 '소녀'였음을, 아니 지금도 여전히 '소녀'임을 몰랐을까. 꿈이 많고 모든 것에 의심없이 기뻐하며 무엇에든 배시시 웃어대는 우리네 소녀들. 그들 중에 이 분들도 있었음을 왜 그리 쉽게 잊었을까. 게다가 그림 같은 소녀 시절을 갑자기 빼앗기고 그렇게 묻혀 살다가 어느덧 온 몸에 박아놓은 모진 세월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 왜 그분들은 그냥 할머니가 아닌 '위안부 할머니'로 불려야만 했을까.
어느 시대 누군가가 덧씌운 이름, 당신들께서는 결코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던 이름, 일본군 위안부.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 이름에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 그저 더 이상은 다른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시절을 설명하기 위해 그 말을 잠시 쓸 뿐이다.
1929년 진주에서 태어나 1997년 폐암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마지막 벗과 함께 "그리 인제 새처럼" 하늘로 날아간 강덕경 할머니. 그 분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은 그 꿈 많던 소녀들의 숨어든 '증언'들을 불러내기 위해 조심스레 초청장을 내미는 일이기도 하다.
'유령' 작가가 들려주는 한 위안부 할머니의 오랜 독백흔히 '유령' 작가로 불리는 대필작가 한 사람이 그야말로 '유령' 같은 세월을 홀로 견뎌 온 한 할머니를 대신해 말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동의한 적도 없고 허락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필작가는 하염없이 세월의 무게에 눌려 '사회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할머니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지은이 배홍진, 그러니까 이 유령 작가는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세월을 '사회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 견뎌온 한 할머니 아니 '소녀'에 대해 경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또 연민을 느꼈다. "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며, 세월도 기록도 그 누구도 제대로 증언해 내지 못한 이 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함부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허락받지 않은 대필 작업. 그것은 이 책의 '진짜' 주인공 강덕경 할머니가 지은이를 만나기 10년 전(1997년)에 먼저 '하늘로 가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지은이의 연민 때문만도 아니었다. 차라리, 세월마저 고개 숙인 '진짜' 세월에 대한 예의였으며 고인의 '진짜' 이름 앞에 나붙은 '거짓' 이름들을 떼내는 조심스런 복원 작업이었다.
이 책은 강덕경 할머니의 '위안부' 시절을 숨은 그림 찾듯 찾아내어 결국에는 깨끗이 걷어내고 '소녀 강덕경'을 최대한 되찾기 위한 개인 작업의 열매다. '위안부 소녀의 생'(1부)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생'(2부)로 넘어가는 이 책의 고갯길은 차라리 거꾸로 가는 길이라 해야 옳다.
그러나, 얼마 후 '소녀'는 15살 꽃다운 나이에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강제로 자신을 허락하는 사람'이 돼버렸고 종전 후 귀국하여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자신의 딸아이를 키우다 네 살이 되던 때에 먼저 하늘로 보냈다. 그리고 "인제 새가 되어" 하늘로 가기까지 줄곧 혼자 지내셨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나눈 정이 두터웠다 해도, 어쨌거나 소녀는 언제부턴가 줄곧 혼자였다.
그 처절하고도 고귀한 생 앞에 지은이는 그대로 같은 한 사람이 되어 고스란히 이야기를 전수 받았다. 그렇다고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생기 없는 딱딱한 기록물에서 솎아낸 텁텁한 개인사 연표도 아니다. 이건 명명백백한 증언이며 절절한 고백이다.
강덕경 할머니의 자기 증언이며 그 이야기를 뼛속까지 들어 새긴 지은이의 고백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욕망이 있다. 그건 결국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그렇게 이해되고 정립된 자아를 가지고 타인들의 삶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동화되고자 하는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다.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면 타인들의 세계 속으로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결국 그녀가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나마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었을 테다."(이 책, 152)시계를 멈추어라, "시간은 누명에 다름 아니다"'시간은 누명에 다름 아니다'이것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김경주가 '볼 것 다 보여주고 사는 사이'인 벗이자 이 책 지은이인 배홍진을 위해 쓴 발문(跋文)에서 처음 했던 말이다. 유령 작가로 살아온 벗이 그토록 오래 아파하고 고민했던 세월이 한 소녀의 삶에서 다시 흔들리는 것을 그는 보았던 것 같다. 그는 어찌보면 지은이 배홍진에게서 강덕경 할머니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한 유령 작가가 유령처럼 살아야 했던 한 위안부 소녀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이야기란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존재의 사라짐에 대해 이토록 천착하게 만들었을까? 연민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시선과 세계가 시대에 무람없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이 책, 223)누구의 삶이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내게는 강덕경 할머니의 '시선과 세계가 무람없이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말로 들린다.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세월 아니 한 사람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 계속 묻어난다. 왜 그런 것일까. 강덕경 할머니의 흩어진 삶을 찾아 고향 진주 수정동, 국회도서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 등등을 누비고 다니며 남긴 눈물과 독백이 지금 같은 공기를 타고 내게까지 메아리쳐 온 것일까.
할머니의 얼굴이 그려진 한 초상화를 통해서 처음 강덕경 할머니를 만났다는 그. 세월마저 벗으로 만드는 연민의 힘 때문인지 10년 전 고인이 된 할머니를 그는 참 반갑게 자기 삶에 모셨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이미 한 식구였다는 듯이. 그는 허락도 없이 할머니 삶을 함부로 찾아내기 시작했고 또 함부로 맞추어갔다.
사실 바람 따라 세월 따라 곳곳에 당신을 남기시고 "그리 인제 새처럼" 날아간 할머니를 위해서는 차라리 함부로라도 그리 해야만 했다. 시간에 따라 또는 사건에 따라 필요할 때만 슬쩍 언급되고만 어느 꿈 많은 소녀의 삶을 그리 함부로 할 순 없었다. 그건 남은 다른 소녀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림으로 처음 할머니를 만나서일까. 그는 12장이나 되는 할머니의 그림을 따라 할머니의 삶 아니 한 소녀의 옛 추억을 되짚어갔다. 사실이라기보다는 꿈과 소망을 담아낸 것 같은 고향 산천을 그린 그림들을 지나가며, 그는 한 소녀가 위안부 할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빼앗긴 순정>(1995), <마츠시로 위안소>(1996), <악몽>(1995) 등은 짓밟힌 꿈, 빼앗긴 삶,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뒤섞인 지난 세월 그 자체이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평화를위하여>(1995)와 <사죄>(1995)를 보고 있자니, 강덕경 할머니를 비롯해 위안부 할머니들 모두 맘에 담아두었을 법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그 혼란한 감정이 뚜렷한 형체가 없는 안개처럼 제 멋대로 피어오르는 듯했다.
<새가 되어>(1995)를 끝으로 어렵사리 할머니를 놓아드린 그. 때로는 발품으로 기록을 모았고 때로는 얼마 없는 영상물을 보며 할머니를 느꼈다. 또 어떤 때는 뼛속까지 스며들도록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그래도 그 연민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지은이는 굳이 '종(終)'을 따로 붙여 연민 그리고 다 말하지 못한 상상을 짧은 일기처럼 5회에 나누어 연속 기록했다. 그리고, 불연듯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할머니에게서 분명히 들었던(!) 말을 툭 던지고 사라졌다. 무슨 못다한 숙제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꿈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다시 힘겹게 내젓는 몸짓 언어가 되어 살아난다.
그리고 이 숙제 아닌 숙제를 끌어안고서, 나는 할머니의 초상화 그리고 거침없는 세월을 역시 거침없는 증언으로 바로세우려 마이크를 움켜진 사진을 찾아 첫 장으로 조용히 서서히 거슬러오른다.
"내가 너에게 70년의 삶을 설명하는 동안 70년의 삶이 지나갔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갔는가?" (이 책, 220) 덧붙이는 글 |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배홍진 지음. 멘토, 2008. 1만원.
12가지 그림(책에 나온 순서대로): <고향-진주 남강>(1994), <길 밝히는 호안>(1995), <눈 내리는 풍경>(1994), <빼앗긴 순정>(1995), <마츠시로 위안소>(1996), <악몽>(1995), <그리움>(1995), <책임자를 처벌하라-평화를 위하여>(1995), <정신대 원귀>(1995), <사죄>(1995), <먼저 가신 이들을 위한 헌화>(1995), <새가 되어>(1995)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멘토프레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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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인제 새처럼" 날아간 '소녀'의 오래된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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