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바로 도깨비골 종로구에 아직 이런 동네가 있다.
송호정
차에서 내려 막다른 길에 서자, 발아래 구릉 지역에 추억의 사진첩 속에서나 보아왔음 직한 동네가 보인다. 여기가 바로 종로구의 산골 마을 입구다.
동네의 형색이 벽돌에 슬레이트 지붕. 언뜻 궁색해 보이지만 좁은 골목길의 한쪽에는 탐스럽게 익은 앵두가 조랑조랑 달려있고 동네 한가운데에는 누렇게 익은 살구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방아 잎, 머구대 이파리, 더덕, 호박덩굴, 상추, 고추 온갖 푸성귀들이 길가 좁디좁은 작은 여유 공간도 허락지 않고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마침 밤나무 꽃이 피어 그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 질 정도다. 마을 중턱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자그마한 와상에는 동네 할머니들 서넛이 모여 낯선 방문객의 출현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정담을 나누고 있다. 오후의 초여름 햇볕이 제법 따갑다. 들고 있던 지도에 표시된 산22-2번지 가는 길을 묻자 친절히 안내해 준다.
"그기는, 모르는 사람은 찾아갈 수 없어요."
하기는 지도에도 번지만 있지, 좁은 길은 표시조차 없다. 동네 할머니가 알려준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오솔길이다. 여기가 과연 종로구인가 싶다. 불과 몇 십 미터만 내려가도 고급주택가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놀랍다. 두 사람이 오가면 어깨가 닿을 정도의 고샅. 이런 고샅을 끼고 함께 살아간다면 이웃끼리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산 22-2번지를 찾아 올라가는 길은 마치 심산유곡으로 들어가는 산길 같다. 주변의 울창한 숲에서 발산하는 서늘하고 신선한 공기가 폐를 타고 뇌에 공급되어서인지 기분이 맑고 상쾌해진다.
동네 뒤로 나있는 좁디좁은 외길을 따라 또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인왕산 울창한 숲 속에 집이 한 채 보인다. 여기가 바로 종로구 부암동 속칭 도깨비골이다. 길가 계곡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계곡을 건너는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자 집 한 채가 나온다.
종로의 두메산골이런 곳에 집이 있다니? 이 집의 주인은 이천복(가명·82세) 할아버지다. 이곳에 터 잡은 지 어느 듯 50년째란다. 집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다.
"우리 애들은 여기서 나고 자랐어요."
"주변 산과 계곡이 놀이터였죠, 뭐!"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바위와 절벽이다. 그래서일까? 자녀들은 감기 한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하게 자랐다고 한다.
김신조가 넘어오기 전까지는 주변에 여러 채의 집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김신조 일행이 넘어왔던 그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청운동 고개에서 경찰의 검문에 쫓겨 할아버지의 집 바로 앞쪽 능선을 타고 홍제동 방향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그날 밤에 총소리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겁이 나서 문을 잠그고 이불 속에서 벌벌 떨었다고 했다.
자녀분들은 어떻게 되시냐고 여쭸더니 다들 '객지'에 나가 산다고 한다. 여기가 종로구인데 '객지'라니? 객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용산'이란다. 시내버스 한번 타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용산을 '객지'라고 하는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온다. 이곳의 지리적인 여건을 대변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