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 또 연행... 박정희가 살아 돌아왔나

20년 가꾼 민주주의의 나무는 이명박 정부에게 이렇게 짓밟혔다

등록 2008.07.04 15:25수정 2008.07.04 16:01
0
원고료로 응원
6월 29일과 30일 아침까지 있었던 일이다. 그날 벌어졌던 상황에 대한 자세한 글이 없어 늦었지만 그날의 폭거를 전한다. 국제엠네스티 조사관이 경찰의 폭력 진압에 따른 인권침해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니 이 글이 조사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기자 주

29일 오후 5시. 촛불집회가 열리기로 한 시청앞 광장은 서늘하다 못해 공포의 광장으로 변했다. 경찰은 수천의 전경 병력을 동원해 시청을 장악했다. 시청으로 진입하는 지하철 입구도 막혔다. 경찰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 다음 시청으로 진입하려는 시민들을 색출했다.

죽여 버린다며 뛰어 오는 경찰... 시민들 "누굴 죽인단 말이냐?"

전날 28일의 공안정국을 넘어 '공포정치'로의 회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을 막고 선 전경들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보았던 풍경이었다. 생각해 보니 전두환 독재정부 시절 혹은 박정희 독재의 공포정치가 그러했다. 그날 적어도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한 수많은 시민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촛불을 들기 위해 모인 이들은 시청광장을 경찰에게 내주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시민들은 을지로와 종로 일대에 산발적으로 모였다. 시민들은 경찰에 의해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경찰은 세종로와 을지로·종로를 다 장악했다. 29일 오후, 세종로와 종로 등의 넓은 대로를 막고 있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경찰이 말하는 무법천지는 경찰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경찰은 사람들이 몇 명이라도 모이면 그 곳으로 달려가 해산을 시켰다. 해산 과정에서 시민을 연행하는 것은 일상이 되어 버린 듯했다.

시민들은 경찰을 향해 산발적으로 "이명박 물러나라" 혹은 "폭력경찰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구호를 외치던 사람은 경찰의 손에 낚아채어 호송차에 실렸다. 그날 종로 보신각 앞 사거리엔 경찰 호송차가 줄을 이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날의 경찰 복장은 검은 티셔츠에 운동화와 장갑. 방패를 든 경찰의 수는 평소보다 적었다. 해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체포를 목적으로 하는 작전인 것이다. 젊은 전경대원들이 교보문고 방향에서 종로 방향으로 "죽여버린다!"고 소리치며 뛰어왔다. 시민들이 "누굴 죽인단 말이냐!"라며 전경대원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덥기만 한 여름날 오후였지만 거리는 한기를 느낄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또한 20년 전에 많이 봐 온 풍경. 인도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20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간 서울 종로 거리. 저녁 7시 무렵. 구호를 외치던 한 시민이 경찰에게 끌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경찰 호송차가 문을 열었고, 시민은 영문도 모른 채 차에 태워졌다.


뭐라고 항변할 시간도 없이 진행된 체포작전은 전광석화 같았다. 경찰들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잡혀가야 하는 공포. 사람들이 시민을 구하기 위해 달려 들었지만 또 한사람이 연행되었다. 연행되는 이유는 집시법 위반이라지만 인도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집시법? 그러나 그날 경찰의 법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입에 걸면 입걸이였다.

차도로는 시민이 접근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날 연행된 시민은 전부 인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10명의 시민이 연행되었다. 그 중에는 촛불소녀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연행된 젊은이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경찰에 연행된 젊은이는 어이가 없는지 반항도 하지 못했다.

횡단보도 막은 경찰, 항의하자 "저거 연행해!"

어둠이 깊어 밤 시간 종로 거리엔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저녁이 올 때까지 이어지던 '공포'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경찰은 휴식을 취했고, 시민들은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경찰 지휘부가 어떤 마음을 먹는가에 따라 공포와 자유가 공존하는 거리. 그러나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3일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요즘의 일을 두고 '법과 질서가 무시되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법과 질서를 무시한 쪽은 경찰이고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었다.

29일 밤 12시를 넘기면서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촛불을 들고 있던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촛불로 방패를 당해낼 수 없음은 당연한 일. 종로 사거리에서 밀린 시민들은 종로3가를 지나 세운상가까지 밀려났다.

밀려난 시민들을 잡기 위해 경찰 수백 명이 종로 사거리에서부터 구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외치며 보신각에서부터 단숨에 세운상가까지 뛰었다.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은 "전쟁이라도 났어요?"하며 거리로 나왔다.

세운상가 앞 인도에는 100여 명도 되지 않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경찰이 오자 곧 청계천 방향으로 도망쳤다. 세운상가 앞 횡단보도를 막고 있는 경찰. 한 시민이 횡단보도를 막고 있는 경찰에게 길을 터달라고 항의하자 지휘관(아랫사람이 그를 과장이라고 부름)이 "저거 연행해!"라고 했다.

그는 경찰 복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사복을 입은 그는 무전기를 들고 있었으며 어딘가 쉼없이 무전을 주고 받으며 귀찮게 하는 시민을 연행하라고 소리쳤다.

전경들이 시민의 팔을 잡았다. 기자가 들어가 사진을 찍자 시민은 곧 풀려났다. 시민은 "횡단보도를 막고 있는 경찰이 불법인데도 길을 열어달라고 한 시민을 연행하려 했다"며 분개했다. 기자가 연행 지시를 내린 과장에게 다가가 어느 경찰서 소속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과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차별 연행에 시민들은 공포... 또 공포...

세운상가 앞의 인도에 있는 시민은 많아야 20여 명. 그때의 시간은 새벽 1시 30분경. 인도에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청계천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잠시 후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

"세운상가 앞에 있던 시민들이 다 연행되었답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연행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계천으로 간 시민들은 동대문을 지나 다시 종로 5가로 돌았다. 그러는 사이 시민들의 수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 시간 종로 사거리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을 비롯해 노회찬,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들이 남아 있었다. 시민들이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종각으로 가려 했지만 경찰이 막아섰다. 시민들은 다시 청계천을 지나 을지로 방향으로 걸었다.

종로에서 청계천, 청계천에서 종로, 종로에서 청계천 청계천에서 을지로까지. 시민들은 거리를 걸으며 "이명박은 물러나라!"를 외쳤다. 새벽 3시경. 시민들은 을지로 3가에 있었다. 길은 어두웠고 인적 또한 뜸했다. 앞서가던 시민들이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로수에 인도가 가린 탓에 상황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 시간 을지로에서 현장 취재를 하고 있는 이아무개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이 잡혔어요. 100여 명은 되는 듯 싶습니다."

시민들이 어둔 거리로 걸은 것이 패착이었다. 그 시간 경찰에게 잡힌 시민들은 모두 연행되었다. 연행될 당시 시민들은 인도에 있었지만 밤새 거리를 걸으며 시위를 했기에 현행범이라는 것이었다.

기자도 시민들과 함께 뛰었다. 조금 뛰다 생각하니 부아가 났다. 왜 뛰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은 무조건 연행 당합니다. 도망치는 게 상책입니다."

기자도 그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시민들이 두려운 얼굴로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을 따라 걸었다. 풍전호텔을 지나 퇴계로로 갔다. 대한극장을 지나 시민들이 숨어든 곳은 목멱산 충정사. 남산 아래에 있는 한국의 집 옆에 있는 절이었다. 충정사에 모인 시민은 20여 명. 서로 아는 사이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집으로 가고 싶어도 대중교통이 없으니 집에 갈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시민들이었다.

"거리로 나가면 위험합니다. 여기에서 첫 버스가 다닐 때까지 있자구요."

시민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20년 전에 나누었던 대화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시민들의 입에서 "무섭다"와 "연행될까 두렵다" 등등의 말이 나왔다. 기자가 20년 전에 경험했던 일들이 20년 후인 2008년에 반복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 순간 기자는 혼잣말로 "밤 거리를 걸아 다니는 것조차 무서워 하는 세상이라니"라며 긴 한숨을 토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달랐다. 충정사에 있으면서도 경찰이 올까 싶어 경계를 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충정사에 오래 있지 못했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은 새벽 3시 40분경. 거리로 나가면 무조건 경찰에 잡힌다며 충정사에 있자고 하는 시민도 있었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이아무개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함께 거리를 걷던 시민들은 아직도 연행되고 있다는 것과 을지로 쪽에 경찰이 쫙 깔려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거, 박정희가 살아돌아 온 것 같아요!"

여성과 남성이 절반쯤 섞인 시민들. 그들은 그 시간 공포를 느꼈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시민들은 논의 끝에 위험하지만 명동 성당으로 가기로 했다. 한 번에 이동하면 위험하니 세 명씩 조를 나누어 몇 분 간격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명동 성당으로 이동하는 동안 시민들은 경찰 순찰차만 지나가도 몸을 움찔했다. 

새벽 4시가 넘어 명동 성당 앞 계단에 도착한 시민들. 그들은 둥지를 지키는 어미새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두려우세요?"
"그럼요, 잘못이 있던 없던 경찰에게 잡혀가면 무조건 이틀은 잡혀 있어야 하잖아요."

대한민국 경찰이 만들고 있는 공포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대답이었다. 화염병을 던진 것도 아니고 경찰과 대치를 한 것도 아닌 시민들이 아니던가. 그저 거리를 걸으며 구호를 외쳤다는 일 하나만으로 시민들이 느끼는 공포는 생각보다 크고도 엄청났다.

다행히 경찰은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첫 버스가 다니기 시작할 시간 계단에 앉아 있던 시민들이 무거운 발을 끌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기자는 함께 했던 일행과 근처에 있는 감자탕 집으로 갔다. 빈 속에 소주를 들이 붓는데 일행이 말했다.

"이거, 박정희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시민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던 걸요."

그랬다. 6월 30일 새벽. 서울 거리는 긴급조치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 그날 연행된 시민만 200여 명에 가깝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명박 정부의 공포정치가 극점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서니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쬐었다. 잠시 쉬자며 외환은행 본점 앞에서 또 다리를 폈다. 밤새 얼마나 걸었던지 걸음을 떼기조차 힘들었던 탓이다. 일행이 쉬고 있는 자리에 동상 하나가 서 있었다.

동상의 주인공은 나석주 의사. 일제강점기 수탈의 진원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한 분이다. 그에게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 시간 나석주 의사는 피로 얼룩진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두 손을 불끈쥐었다.   
#폭력경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2. 2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3. 3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4. 4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5. 5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