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수 지음 빼앗긴 일터
창비
1987년 7, 8월 전국 노동자들의 들불처럼 타오르자 그녀는 투쟁 현장에 뛰어 취재를 하고 기관지의 기사를 썼다. 당시 거제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최루탄 파편으로 죽어간 노동자 이석규 열사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노동운동의 큰 관심사업장이 된 대우조선 노동조합을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기록하기로 하고 88년에 거제도로 내려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우조선소 노동자들 주변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앞에 일이 닥치는데 '글쟁이처럼' 기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거제도의 사람들은 현장으로 그녀를 불러들였고 '삼성조선노동조합 추진 공동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실무를 맡기도 하고 89년 초에는 대우조선 노동자들 10여명이 목돈을 거출해서 ‘일사랑 도서원’을 창립하여 실무를 맡기도 한다.
'일사랑 도서원'은 노동자들이 퇴근 후에 와서 책도 보고 소모임도 하고 현장의 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명실공히 노동자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일사랑 도서원'을 통해 노동자들이 모이고 결속력도 강화하게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보아온 당국에서 '일사랑 도서원'의 운영위원인 노동자들을 '불온서적 소지'·'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구속하면서 도서원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원래 내려갔던 목적과 달리 거제도의 대우조선 해고 노동자와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던' 결혼을 하게 되고 '거제도 사람'이 된다. 이후 복직되지 못한 남편의 생업을 따라 2006년 경기도 광명시로 이사 오기 전까지 몇 년간은 거제경실련 사무국장 일을 맡아서 해왔다. 광명시에 오게 된 후에도 '광명경실련' 일을 하다가 2007년 3월에 성공회대에 입학했다.
왜 그 나이에 대학공부의 필요를 느꼈는가? 이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그동안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할 때 뭔지 딱 집어서 얘기할 수 없지만 목에 턱턱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몸으로 부딪치면서 쌓은 지식들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체계화 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식인들이 어떤 이론을 내놓으면 감으로는 분명 아닌데도 경험으로만 쌓은 지식으로는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노동운동의 수많은 역사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거나 때로는 왜곡되어 있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그래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 체계화 된 이론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명분 저변에 중학교도 가지 못했던 오랜 한과, 지적욕구에 대한 갈증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오게 하는 동력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이렇게 대학에 들어온 그녀는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지식의 확장을 통한 풍요로움도 느끼고 있고, 그동안 쉬지 않고 일만 해 오다 비로소 휴식을 얻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현장과 동떨어진 채 책상 앞에서 현실을 진단하고, 관념적인 주장을 펴는 먹물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지나온 삶과 학문의 태도에 기대되는 바가 크다. 갱년기인 그녀가 열아홉, 스무 살 청춘으로 돌아가 행복해 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교정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도 그녀는 자신 딸 또래인 동급생들이 언니, 이모, 선생님, 누님 등 다양한 호칭에 명랑하게 대답하고 즐겁게 웃는다. 술자리에서는 그녀한테 "왕 누님!"이라고 부르는 교수도 있다고 한다.
녹음 짙은 캠퍼스에 젊은 지성이 상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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