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딸과 느린 엄마

등록 2008.07.14 18:24수정 2008.07.1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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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딸아이의 두 가지 철칙은, '아침밥을 꼭 먹는다'와 '지각하지 않는다'이다. 둘 다 좋은 일이라 나쁘다 할 수는 없으나, 바로 옆에 학교를 두고도, 늦지도 않는 시간에 늦을 까봐 노심초사 하는 딸을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속에서 부글부글 올라온다. '누가 지 애비 자식 아니랄까봐 성질은 급해가지고'하면서.

 

아침마다 밥을 먹고는, "늦겠다. 다녀오겠습니다"하면서 서둘러 나간다. 그럼, 나는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가라"하면 "아, 예~"하면서 발걸음은 언제나 종종걸음이다.

 

베란다 창문으로 아이가 가는 모습을 보면 다른 얘들은 느긋이 걸어가는데, 혼자 바삐 뛰어가고 있다. '아이고, 언제쯤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해지려나, 급해서 좋은 것은 없는데' 싶다.

 

나의 하소연에 주위에서는 하나 같이 '느린 것보다는 훨씬 낫다'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남편은 "당신처럼 매사 천하태평이면 곤란"이라 하고, 하물며 우군인 친정식구조차 "너보다 훨씬 나으니까 신경 꺼라"한다.

 

딸아이와는 반대로, 고3인 장조카는 늘 느긋하다. 나를 닮았는지 '살다보면 지각할 수도 있고' 하면서 아침마다 느긋해서 아들이 지각할까봐 오히려 언니가 노심초사다.

 

"야, 임마. 늦다. 빨리 좀 준비해서 가라. 니는 아침부터 신문이 눈에 들어오나"하면 "아, 맘. 요것 보고 가도 안 늦어요"하면서, 능글능글 느긋한 아들을 보면 속이 터진다.

 

'좀 빠릿빠릿 준비 좀 하지. 누굴 닮아 저리 느긋한지', 매사 철저한 성격의 언니의 입장에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어째, 성격상은 조카가 내 아들 같고, 내 딸이 언니 딸 같다.

 

만나면 두 자매가 하는 말은 "둘이 좀 섞어 놓으면 좀 좋아"이다. 헌데, 그게 어디 인간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남편과의 성격차이로 처음엔 마찰도 있었다. 헌데, 성격이란 것이 쉬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약이라 세월에 조금씩 눈감아 주고 살 뿐.

 

남편은 예를 들어, 라디오가 고장 났다면, 바로 고치러 가야 한다. "내가 내일 맡길게"하면 "시끄럽다. 뭘 내일까지 기다리노" 하면서 곧장 대리점으로 향한다. 해서, 가끔은 내가 편할 때도 있다.

 

또, 반대로 급한 성격에 손해 보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옷을 사야 한다면, "쪼매 기다리면 세일 할 긴데 그 때 사자" 하면 "시끄럽다마. 언제 세일 한다고? 그 때까지 못 기다린다"하면서 바로 산다. 그러다 며칠 후 세일을 하면 '고걸 못 기다려서' 싶다.

 

딸아이가 조금은 여유로운 성격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하루는 얘기를 꺼냈다.

 

"00야, 사람이 살다보면 지각할 수도 있는 거야. 지나면 그게 추억이 되고."

"엄마는 별게 다 추억이야. 지각하면 벌 청소해야 돼. 난 그게 싫거든."

"까짓 좀 하면 어때서. 물론 늦을 때는 뛰어야겠지. 헌데, 늦지도 않는데, 뛰면서 가는 것은 별로 보기 안 좋아.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하여튼 엄마는 느려"

"느린 것이 좋을 때도 있어. 바쁘게 종종거리면 본인이 힘들어."

"엄마, 급하면 본인이 힘들지 몰라도. 엄마처럼 느리면 옆에 사람이 속 터져."

 

이제 10살 된 딸에게 이런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다니. 그동안 늘 급한 성격의 두 부녀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뭣이라 나의 느린 성격 때문에 두 부녀가 속이 터졌다고?

 

'딸, 엄마도 원래 그리 느긋한 건 아니었거든. 성질 급한 사람이랑 살아봐. 한 쪽은 느긋해지는 법이야. 같으면 사는 게 힘들어. 이런 것이 다 인간의 생존본능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쪼금씩 양보하며 맞춰서 살아 보더라고.'

2008.07.14 18:24ⓒ 2008 OhmyNews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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