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발표한 '불온서적'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불온서적'특별전 페이지 모습
인터넷화면 캡쳐
어젯밤(7월 31일) 모처럼 일찍 퇴근해 밤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국방부가 불온서적 리스트를 작성해 일선 부대에 하달했다고 합니다.'
"엥? 이게 무슨 소리지?"
이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인터뷰가 나왔다.
"저는 책에서 오히려 미국의 좋은 점도 여러 번 강조했거든요."
순간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지금 언급하고 있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불과 내가 50여 일 전에 부대 내무반에서 읽고 있던 책 아닌가. 당시 나는 장하준 교수의 이론에 감탄하면서 그 책을 세 번이나 열독했다. 그리고 제대하는 날, 후임에게 그 책을 선물로 주고 나왔었다. 그렇다면 나는 미래의 군대를 다녀온 것일까?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장 교수는 개도국 보호무역 뿐만 아니라 특허권 등 선진국이 주장하는 독점적 지위에 대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 선진국도 그렇게 성장을 하였다. 또한 장 교수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시장 인센티브와 국가 관리의 교묘하고도 실용적인 조합이 빚어낸 결과라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공산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장을 말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자유시장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식 경제 발전은 전략은 시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시장이 정책 개입을 통해서 조정되어야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온서적'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요지다.
위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주로 과거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을 바탕으로 현재 자유시장 체제를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방부는 박정희의 경제성장 모델도 불온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정말 행복한 시기에 군생활을 했구나'군에 있던 2년 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반입을 저지당하거나 책을 빼앗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군대를 다녀온 다른 선배,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니 마찬가지였다. 물론 군대에서 불온서적 목록이 존재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국방부에서 금서목록을 발표하고 회수조치 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었다고 한다. 최소한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말이다.
순간 '나는 참 행복한 시기에 군생활을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를 단지 군인신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탈당한다는 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군인들을 잠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여기기보다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어떤 자유를 박탈당해도 상관없는 부속물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우리 부대에는 누구나 꺼내서 읽을 수 있는 서고가 있었다. 그 서고의 책들은 지방청에서 매달 몇 권씩 보급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아래는 그중 내가 기억나는 책들이다.
<오래된 정원> - 황석영 <노무현 죽이기> - 강준만 <당신들의 대한민국> - 박노자 <개념어 사전> - 남경태 물론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도 서고에 꽂혀 있었다.
국방부가 불온서적 지정에 대해 밝힌 이유는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해서", "북한을 찬양하고 미국을 비판해서" 등이다. 그렇다면 위 책들도 대부분 불온서적에 포함될 기준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저 책들을 읽었고 같은 군인 신분인 지금의 군인들은 반입조차 금지당하는지 모르겠다.
군인들을 욕보이고 있는 국방부내가 군대에서 독서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사회생활 적응에 애를 먹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 인턴기자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군대라는 제한된 공강에서 사회를 간접체험하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독서라고 조언해줄 예비역들은 많을 것이다. 이미 많은 예비역들이 "군생활이 고달파질 때마다 나를 잡아준 것은 짬짬이 할 수 있는 독서였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국방부는 불온서적을 막는 거지 독서자체를 막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방부가 불온서적 선정기준으로 밝힌 '정부정책 비판'이나 '친북반미' 같은 애매모호한 기준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군인들이 서점에서 고를 수 있는 책이 얼마나 될까. '자유로운 사고' 자체를 억압받는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군인들은 '제대 이후'를 준비할 수 있을까.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제대 이후를 함께 도모해도 모자랄 판에 2년 동안 '이 책은 읽지 마라'고 지시하는 게 국가 전체적으로도 무슨 이익일까?
국제적으로 새나갈까봐 우려스러울 정도다. 이번에 불온서적 목록에 있는 노암 촘스키의 저작이 미국에서 금지됐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는 촘스키가 이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남북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대학 교양교과서로 쓰이는 책까지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 국방부는 불온한 서적의 명확한 기준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라고 해도 생각의 자유, 책 선택의 자유까지 침해할 수는 없다. 군인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단지 2년동안 잠시 국가에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그 신성한 봉사의 의무를 충실히 시행하고 있는 군인들을 더 이상 욕보이지 마라.
덧붙이는 글 | 윤서한 기자는 <오마이뉴스> 8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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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무반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 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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