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옆지기와 이야기합니다. “우리 아이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될까?” “아마, 그렇겠지요.” “우리 아이가 쓰잘데기없는 책에 마음을 빼앗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대로 두어야 할까?” “그대로 둬야지요.” “하긴. 나도 누가 나한테 책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으니. 믿어야지.”
.. 나는 학생들의 반지성주의를 주로 학생 개인의 탓으로 돌렸지만, 학생들 사이에 이런 태도가 만연하게 된 데는 이런 태도를 용인하는 사회의 탓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햑 레이건 정부 시절부터 대학은, 이윤을 지향하는 일종의 회사로 변모되었다 … 기업형 학교에 저항하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소수에 그쳤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무 의문을 갖지 않았다. 돈을 벌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일 뿐 아니라, 나아가 칭송 받는 세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 (40∼41쪽)
곰곰이 돌아봅니다. 저한테 책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습니다. 혼자서 책방을 찾아다녔고, 혼자서 책을 읽었고, 혼자서 곱씹으면서, 혼자서 생각을 갈무리했습니다. 읽을 책 하나를 일러 주거나, 읽은 책 하나를 되새기도록 돕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스승이 되어 준 분들은 많습니다. 말씀보다는 몸으로, 이야기보다는 움직임으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길을 내밀어 준 분들은 많습니다.
이분들 가운데에는 책을 거의 안 읽거나 못 읽은 사람이 많고, 책을 제법 읽은 분도 있으며, 그럭저럭 책을 가까이한 분도 있습니다. 때때로 책을 추천해 주거나 선물해 주는 분이 있었으나, 선물받은 책은 썩 내키지 않아서 뒤로 밀어 놓았습니다. 진작에 읽은 책은 읽었기에 다른 이한테 줍니다. 그동안 책방을 다니며 살펴볼 때 영 달갑지 않아서 도로 꽂아 놓은 책은, 선물받은 책이었어도 헌책방에 내놓습니다.
책을 무척 많이 읽고 갖춘 분 집이나 일터를 찾아가게 되면, 이분이 어떤 책을 살펴 오셨는가를 차근차근 훑은 다음, 이분이 들여다본 책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읽곤 했습니다.
.. 기자들이 시간을 내서 미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경험했으면 좋겠다. 살펴볼 의지만 있다면 불평등은 쉽게 감지되기 때문이다. 내가 옛날에 가르쳤던 학생들처럼 의도적으로 외면하지 않는 한, 불평등의 현실을 피할 수는 없다 .. (48쪽)
늘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조금이나마 번 돈이 있으면 책값으로 바치며 살아옵니다. 빌리거나 얻어서 읽은 책에는 ‘밑줄 긋고 생각 적바림하며’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 하나를 여러 달 동안 들고 다니면서 읽다 보면 책이 너덜너덜해지기도 하는데, 제 돈으로 장만해서 제 물건으로 삼지 않는 책이라면, 이렇게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글쓴이와 출판사를 헤아리면서 책을 사지는 않았습니다. 내 물건으로 가지고 있어야, 내 마음대로 책 구석구석에 온갖 생각을 끄적이면서 스스로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읽을 책은 내 돈으로 산다’는 생각을 굳게 지키며 살아옵니다.
옆지기하고 책방 나들이를 할 때면, 옆지기는 제가 일찌감치 읽은 책을 고르기도 합니다. 이때, 제가 낙서 거의 없이 깔끔하게 본 책으로 있다면 ‘그 책은 집에 있어요’하고 말합니다. 제가 낙서도 많이 하고 밑줄과 별과 온갖 끄적임을 한 책으로 집에 있다면 아무 말 하지 않고 겹으로 사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무래도, 자기 마음이 와닿는 대목을 자기 스스로 찾고 느끼며 읽어야 할 텐데, 낙서가 가득한 책을 읽게 되면, 자기 생각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집에 갖추어 놓은 적지않은 책들은 제가 온갖 낙서를 잔뜩 해 놓았는데, 먼 뒷날 우리 아이가 자라서 스스로 책을 찾아서 읽을 나이가 된다고 하면, 지 아비가 끄적인 자국 때문에 책읽기를 꺼릴는지 모릅니다. 뒷날에도 판이 끊어지지 않아서 새로 장만할 수 있는 책이라면 괜찮지만, 판이 끊어져 이 하나만 겨우 간수하고 있는 책이라면 참 미안한 노릇입니다.
.. 이 부유한 1퍼센트 가구가 차지한 몫은, 가장 가난한 20퍼센트의 가구를 구성하는 2225만 5600가구가 차지한 몫의 48배였다. 오늘날의 전반적인 소득 분배 상황은 1920년대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불평등하다 … 고층 건물 건축 바람이 불고, 더 많은 도로가 건설된다. 상류층을 상대로 한 상점과 식당이,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상점과 식당을 대체한다. 주택 가격은 치솟는다.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든다. 정치권력도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 (99쪽)
우리집 두 식구는 책을 가까이하고 있으니, 우리 아이도 어느 만큼은 책을 가까이하며 지내리라 봅니다. 우리집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이 없고, 다른 놀이감도 없으니 책하고 놀며 지낼지 모릅니다.
책은, 우리가 세상을 알아가거나 느끼거나 배우는 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이 책 하나를 가까이하며 자기 눈을 넓히고 마음을 틔울 수 있으면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아이한테 억지로 책을 손에 쥐어 줄 까닭은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 두 사람은 우리 두 사람대로 즐길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책을 읽어서 좋은 생각을 얻었으면, 이 생각을 우리 스스로 몸으로 옮기며 살아가면 됩니다. 책을 읽다가 어딘가 얄궂다고 느낀 대목이 있으면, 얄궂은 대목을 콕콕 집어내어 걸러낸 다음, 우리 깜냥껏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이가 어릴 적에는 틈틈이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소리내어 읽어 주면 됩니다. 아이가 글을 깨친 뒤에도 세 식구가 번갈아 가며 책을 소리내어 읽으면 됩니다. 동생을 낳는다면, 세 식구가 돌아가며 책을 읽어 줄 수 있고, 동생이 자라면 네 식구가 돌아가며 읽을 수 있을 테지요.
어느 한편으로 보면, 어버이가 아이와 소리내어 책을 읽어 주면서 아이한테 말을 가르쳐 줍니다. 낱말을 읽는 법, 낱말과 낱말이 이어졌을 때 어떻게 소리내는가, 낱말 높낮이와 길이는 어떠한가, 어느 자리에서 힘을 주고, 어느 대목에서 끊는가를 시나브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요즈음 책치고 올바르고 알맞은 말씨로 이야기를 엮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책을 펼쳐서 읽는 동안, ‘그 자리에서 곧바로 걸러내어 읽어야’ 합니다. 옆지기와 동화책을 번갈아 읽을 때에도, 틈틈이 ‘잘못 쓴 글’을 고쳐서 읽었습니다. 이를테면, “소란스런 학교로군. 이래서야 집중해서 공부가 되겠나” 같은 글월은 “시끄러운 학교로군. 이래서야 마음을 모아 공부할 수 있겠나”로 고쳐서 읽습니다. “피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습니다” 같은 글월은 “피어는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습니다”로 고쳐서 읽습니다.
.. 보통,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라는 우울한 과학에서만 사용하는 특수한 언어를 독자들이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글을 쓴다. 하지만 경제학 용어에 익숙한 독자는 거의 없다. 나는 글을 쓴 사람부터가 자신이 쓴 글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명확한 용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 (133쪽)
골목길을 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면, 또 꼭 사진을 안 찍더라도 골목마실을 하노라면, 동네 어린이를 마주치기 어렵습니다. 마주친다고 해도 한둘이나 서넛일 뿐, 무리지어 노는 어린이를 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도 어린이가 없다지만, 도시에도 어린이는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도시로 떠나니 어린이가 없고, 도시에서는 학원에 가랴 집에 붙잡혀 공부를 하랴, 또는 컴퓨터에 빠지거나 텔레비전 보느라 바빠서 골목으로 나와서 놀지 못합니다.
웬만한 어버이들은 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우고, 아파트에는 코딱지만한 놀이터가 아주 조그맣게 붙어 있습니다. 그나마 놀이터와 아파트 사이에는 주차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아파트로 들어서는 자동차는 빠르기를 줄이지 않습니다. 아파트가 모여 있는 곳 바깥으로는,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자동차가 넘실거리는 한편으로 시끄러운 노래를 틀어놓는 가게가 줄지어 있습니다.
동무를 사귀기 어려운 어린이요, 동무를 사귄들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맺히도록 뛰어놀 빈터가 없는 어린이입니다. 우리 아이라고 해서 남다를 수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도심지요, 그나마 우리 집은 아직 골목길이라 해도, 이 골목길이 앞으로 언제까지 ‘재개발로 안 쓸려 없어질’는지 모릅니다.
.. 우리는 인디언에게서 토지를 훔쳐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관개농업을 도입했고, 물을 오염시키고 식생을 파괴하는 소를 방목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 땅을 ‘개선’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초대형 고속도로가 사막을 가로지른다. 광산은 산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며, 댐은 협곡에 홍수를 일으킨다. 군대 주둔지나 피닉스ㆍ라스베이거스ㆍ로스앤젤레스 같은 거대 도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더럽힌다 … 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도시들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계속 성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253∼254쪽)
아이한테는, 제가 어릴 때 겪어 보기로도, 무릎이 깨지든 머리통에 혹이 나든, 신나게 뛰어놀 곳이 있어야 합니다. 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놀다가 다치기도 하고, 놀다가 울기도 하면서 스스로 크고 동무들하고 함께 자라야 합니다.
혼자서가 아닌, 두서넛이 아닌, 열 스물 무리지어서 놀아야 합니다. 망까기를 하든 금긋기 놀이를 하든 고무줄을 하든 술래잡기를 하든 저희끼리 가르치고 배우고 규칙을 세워서 놀아야 합니다. 놀고 나서는 집에 와서 씻고 자기 옷가지는 자기가 빨고 몇 가지 심부름을 한 뒤, 저녁나절에는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옛이야기를 듣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잠들어야지 싶습니다.
신나게 뛰어놀 곳은 땅이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아닌 흙과 풀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축구장에만 잔디를 깔 일이 아니라, 우리 삶터 어디나 시멘트가 아닌 흙이 있도록 간직하면서 풀꽃과 나무가 자라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 어느 날 우리는 거리에서 만난 열 명 남짓한 주민들을 붙들고 그 커다란 나무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나무 이름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인근에 위치한 식물원의 전문가 역시 그 나무의 이름을 몰랐다 … 자연재해는 정치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 즉 귀찮은 가난한 사람들을 주요 도시에서 제거하고 시장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을, 우리 대신 처리해 줄 것이다 .. (312, 366쪽)
그렇지만, 놀이동무도 또래동무도 만나기 힘든 도시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간다 하여 학교에서 홀가분하게 놀 수 있으려나요. 학교 공부를 마친 뒤에는 즐겁게 놀 수 있으려나요. 초등학생 때뿐 아니라 중학생 때와 고등학생 때에도 놀아야 할 텐데, 중학교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 수 있고, 고등학교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 수 있는가요.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 동안, 스스로 놀고 동무와 노는 법을 몸으로 얻어 익히지 못하는 아이들한테, 책이란 교과서란 지식이란 졸업장이란 회사란 무슨 쓸모나 값어치가 있을까요. 동무와 사귀는 법, 아니 동무와 사귀면서 세상을 즐기는 삶을 꾸리지 못하는 아이가, 제아무리 학교 공부를 잘하고 시험점수가 높게 나온다고 하여 우리 두 사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저와 옆지기는 우리 아이가 똑똑한 아이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똑똑하게 자랄 수도 있으나, 슬기로운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슬기롭지는 못하더라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가는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씩씩하지는 못하더라도 착하게 어울리는 삶을 가꿀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착함이 첫째고, 씩씩함과 튼튼함이 둘째며, 슬기로움이나 올바름이 셋째입니다. 똑똑함은 있어도 좋으나, 없다고 나쁘지 않습니다.
(2) 삶터, 겨레, 나라, 이웃, 마을
앞으로도 집에 텔레비전은 들여놓지 않을 테지만, 비디오테이프를 볼 수 있는 장비는 들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브이디로 나오지 않는 예전 영화, 극장에서 좀처럼 볼 수 없으며, 틀어 주는 사람마저 없는 예전 영화는 우리 스스로 비디오테이프를 장만해서 보아야 합니다.
엊그제, 영화 <로빙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동네에 거의 하나만 남은 퍽 오래된 비디오집에 타르코프스키 테이프도 있고 키아로스타미 테이프도 있다고 하니, 우리 집에 장비만 있으면 빌려서 볼 수 있습니다. 이웃집 사람을 불러서 함께 보아도 됩니다. 비디오집이 문닫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틈틈이 그 영화를 아주 싼값으로 빌려서 볼 수 있습니다.
.. 일상적인 일의 대부분은 브라질, 멕시코, 네팔, 벨로루시 출신 이민자들의 몫이다. 이민을 왔건 이곳 출신이건 상관없이, 이곳의 모든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도 표준 정도의 집에서 살아갈 비용을 대기가 어렵다 … 값비싼 집들이 새로운 개발 부지에 건설되고 있고 건설할 예정인 집도 많다. 이로써 일자리가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건설 관련 일자리가 생기겠지만, 한편으로는 경관을 해칠 것이다 … 이주 노동자들은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최고로 가난한 사람인데도,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만연하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 문제다 … 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회 보장세를 포함한 세금을 내며, 고용주들에게 이윤을 안겨 준다 .. (21∼22, 247쪽)
우리 두 사람한테 걱정이 있다면, 살붙이들과 이웃사람들과 동무들까지 거의 모두 ‘제도권 학교와 학원을 꼬박꼬박 다녀서 큰 회사에 들어가 펜대 굴리며 높은 연봉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 아이가 크기를 바라는 데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따스한 울타리가 되어 아이를 지켜 줄 수 있을 터이나, 아이가 우리 울타리를 바라지 않으면 뛰쳐나가겠지요. 아이 스스로 돈을 더 바란다면 스스로 다른 살 길을 찾아갈 테지요.
아이 밴 어머니가 산부인과에 안 가면 미친사람으로 여기는 눈총을 받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아이 낳을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는데, ‘예전에 집에서 아이를 낳으셨던 이웃 할머니’조차 병원에 가라고 채근입니다. ‘세이레(삼칠일)’라는 말은 낡아빠진 말로만 남았을 뿐, 어느 어르신도(딱 두 분만 빼고) ‘세이레’를 왜 지키고, 세이레를 어떻게 지키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와 낳은 뒤, 아기 어머니가 어떻게 몸풀이를 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알고 있는 어르신이 몹시 드뭅니다. 의사라는 사람도, 보건소 직원도 ‘초음파 검사’니 ‘양수 검사’니 하는 지식은 갖추고 있으나, 아기가 어머니 몸에서 자라는 흐름과 어머니 몸 바깥으로 나오는 흐름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 오히려 손님들은 우월감을 느꼈다. 명찰을 패용한 사람은 시중드는 사람임을 의미했다. 손님들은 무례했고, 생색내는 오만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 하지만 수많은 손님들이 나를 감정이 있는 실제 인물로 취급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 그들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돈을 썼으므로, 그들의 유일한 의무는 지불한 돈에 걸맞은 여가를 즐기는 것뿐이다 … 사람들은 호텔 밖에서, 그들이 다시는 보지 못할지 모르는 경이로운 일이 벌어질 때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 호텔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 (74∼76쪽)
가만히 생각합니다. 담배도 우리 몸에 나쁘지만 자동차 배기가스는 우리 몸에 훨씬 나쁩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은 더욱 나쁩니다. 그렇지만 우리 둘레 어느 누구도 자동차를 덜 타거나 안 탈 생각이 없고, 공장에서 새 물건을 끊임없이 ‘안 만들어도 되는 물건 씀씀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쓰레기봉투를 사서 길에 내놓는다고 쓰레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집에서 어느 매립터로 옮겨 갈’ 뿐입니다. 헌책방에서는, 또 골목집에서는 ‘이마트 끈’을 책 묶는 데에도 쓰고, 꽃그릇 버팀나무 세우는 데에도 씁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쓰기를 하면서 쓰레기를 안 만드는 사람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요.
출판사에서는 책에 비닐을 씌울 뿐더러 책날개를 두 겹 세 겹으로 씌우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겉보기 좋으라고 상자를 여러 겹 만드는 백화점 물건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장보러 다닐 때 장바구니나 손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은 몇 퍼센트나 될는지요. ‘큰 하나(거대 담론)’는 할 줄 안다고 해도 ‘작은 하나(생활 실천)’를 죄다 놓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올바르거나 아름다운 쪽으로 고쳐나갈 수 없다고 느낍니다. 진보나 개혁을 꿈꾸든 경제성장이나 고소득을 바라든, 우리 스스로 우리가 늘 부대끼는 ‘작은 삶’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고 느끼지 못한다면, 입 큰 청개구리 꼴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 나는 아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쌓아 가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을 두고 경쟁하는 현실 속에서는 노동자 사이의 연대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 영구적인 불평등은 포틀랜드뿐 아니라 우리 나라(미국)의 모든 도시를 괴롭힌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다. 미국에서 실업률이 높은 축에 속하는 도시, 거리마다 노숙하는 아이들로 넘쳐나는 도시, 고속도로 진출입로마다 거지들이 구걸하는 도시에서 저녁 식사 손님은 레스토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비싼 식사를 했다 .. (198∼199, 214쪽)
유럽나라 책마을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부산 책방골목은 이야기하지 못하는 한국사람입니다. 미국 할리우드를 읊을 수는 있으나, 대구 골목길은 살피지 못하는 한국사람입니다. 인도와 티벳과 몽골을 나들이하지만, 정작 우리 삶터 구석구석 두 다리로 밟아 보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나라밖에 나가 보면 눈이 트이고 생각이 열린다고 하는데, 나라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눈이 트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는 좁은 울타리’, 그러니까 ‘아파트숲’과 ‘시멘트 도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눈이 트였을 뿐입니다.
머나먼 나라까지 비싼 비행기삯을 들이지 않고,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 아파트숲과 시멘트 도시를 벗어나서 동해에서 서해로, 강화에서 제주로 죽 달려 본다면, 해남에서 통영으로, 고성에서 홍성으로 달려 본다면, 얼마든지 생각이 열립니다. 제주섬만 한 바퀴 자전거로 돌아도 마음문이 활짝 열립니다.
(3) 여행이야기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
늘그막에 걱정없이 놀고먹을 수 있던 경제학과 교수 부부가 굳이 ‘교수 자리’를 그만두고 ‘국립공원 비정규 노동자 자리’로 옮아가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를 읽습니다. 경제학 교수인 만큼, 자료와 숫자에는 눈이 밝았을 텐데, 자료와 숫자는 종이에 적힌 글자입니다. 몸으로 부대끼면서 살갗으로 받아들이는 앎이 아닙니다. 비정규 노동자를 아무리 많이 만나 본들, 스스로 비정규 노동자로 살아 보지 않고서야, 비정규 노동자들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자기 나름대로 삭일’ 수 없습니다.
.. 고용주는 가능하면 숙련 노동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싸기 때문이다 … 근대의 작업장은 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자신의 시간을 회사에 제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 가끔 고객의 요구 사항이 없을 때가 생기면 새로운 과업이 배정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럼으로써 온종일 꾸준히 업무에 임하도록 강제되었다 … 우리는 전체 작업 구조에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대신, 일을 회피하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앙심을 품는다 … 날이 저물면 나는 자유로웠지만,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7시 무렵의 이른저녁부터 잠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책을 읽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 (86∼89쪽)
글쓴이 ‘마이클 예이츠’님은, 여러 해에 걸쳐서 넓디넓은 미국땅을 동서로 가로지르면서 ‘싸구려 모텔’ 방을 얻어서 지냅니다. 모텔 방을 얻은 다음 하는 일은, 드넓은 미국땅 자연이 어떠하고, 이 자연을 둘러싸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기.
미국땅에서 미국사람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미국사람다운지 살펴봅니다. 미국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 미국사람인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자유와 민주와 평화라는 이름은 얼마나 허울좋게 사람들 삶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지켜봅니다.
.. 서부에 머물 때는, 피츠버그나 존스타운에 살때 왜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답은 간단했다. 동부의 하늘은 쳐다볼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 마지막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한 것은 맨해튼의 무관심한 정서였다. 도시가 너무 크고 비인격적이어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 (115, 156쪽)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나라라고 합니다. 언제나 “자유라는 이름”과 “민주라는 이름”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선거도 경제도 정치도 문화도 예술도 교육도 과학도. 우리와 한겨레인 북녘도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입니다. 늘 ‘민주’가 앞세워지고 ‘인민’이 우러름받으며 ‘공화국’으로 살림을 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어떤 사람한테 어떤 자유를 어떤 모습으로 지켜 주고 있는가요. 우리 사는 남녘땅에서 자유는 어떤 사람한테 어떠한 모습으로 누릴 수 있도록 되어 있는가요. 대통령이 말하는 민주와 국회의원이 말하는 민주와 신문기자가 말하는 민주와 대학교수가 말하는 민주와 동네 아저씨가 말하는 민주와 학원강사가 말하는 민주는 서로 얼마나 가까운가요. 또는 먼가요.
싸구려 민주만 나돌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싸구려조차 안 되는 민주가, 거짓 민주가 껍데기 민주가 겉치레 민주가 눈속임 민주가 사탕발림 민주가, 그러니까 돈이 되면 어떻게 하든 다 좋다는 민주만 판치고 있지 않습니까.
덧붙이는 글 | * 붙임말 : 느낌글을 쓰면서 굳이 붙이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뒤죽박죽인 띄어쓰기는 둘째치고라고, 오탈자가 서른 군데 가까이 잡혀서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쪽수가 400쪽이 넘는 책이었고, 본문 원고가 무척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을 텐데, 미국 프로농구단 가운데 하나인 "보스턴 셀틱스"를 "보스턴 켈틱스"로 적은 대목은 참 얄궂었습니다. 어쩌면, '켈틱스'로 적어야 올바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매체와 사람들은 '셀틱스'로 쓰는데, 아무런 각주 없이(이 책에 붙은 수많은 각주를 생각해 본다면) 덩그러니 "보스턴 켈틱스"라고 적은 갖가지 오탈자 들은 2쇄나 3쇄에서는 하나하나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8.05 18:28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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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 - 어느 경제학자의 미 대륙 탐방기
마이클 D. 예이츠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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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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