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아이리스>보다 더 좋은 게 있어

[서평] 정효찬 <미술 0교시>

등록 2008.08.06 10:01수정 2008.08.0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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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 0교시
미술 0교시이다미디어

우리는 안다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늘 안고 살아간다. 시험을 봐도, 답사를 가도, 미술관을 가도 아는 만큼 점수 얻고,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보는 만큼 느낄 수 있다는 주술에 걸린 채로 주눅 들어 살아간다.

과연 그럴까? <미술 0교시>(이다미디어 펴냄)의 저자 정효찬은 수긍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눈높이를 같이하고 다른 사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고개 끄덕이는 게 아는 것이라면 예술을 바라볼 때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는 만큼 보일 수도 있지만, 몰라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게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원시 미술 - 문자 등장 이전의 소통 수단

문자는 청동기 시대 등장했다고 전해진다. 문자 등장의 배경이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일 때 누가 냈는지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동기 시대는 잉여 생산물이 축적되면서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이 출현하는 시대였다.

문자가 등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동굴이나 바위에 그리고 새긴 그림을 통해, 진흙이나 석회암으로 만든 조각품을 통해 표현했다. 이들을 우리는 원시미술이라 부른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라스코 동굴 벽화, 반구대 바위그림,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원시 미술을 통해 우리들은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 종교, 사회상 등을 추정해본다. 그런 추정이 진실에 얼마나 접근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생각으로 당시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런 의견이 모여서 지식이 되고 아는 것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굳어지는 지식은 과연 얼마나 진실에 접근하고 있을까? 저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한 학생에게 메모를 주고 메모의 내용을 문자나 숫자가 아닌 그림으로 칠판 위에 표현하게 했다.


그녀는 예뻤다 메모를 받고 그린 학생 그림
그녀는 예뻤다메모를 받고 그린 학생 그림이다미디어
그런 뒤 그림을 그린 학생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에게 나름의 관점에서 그림에 대한 해석을 해보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은 갖가지 기상천외한 대답을 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으로 미루어봐서 여신을 그린 것이다."
"머리가 빠져서 고민하는 여성 탈모를 표현한 것이다."
"누워서 비를 맞는 것이다."
"코가 없다고 비난받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그림이다."


이처럼 학생들의 학설(?)은 참으로 다양했다. (책 속에서)

저자가 그림을 그린 학생에게 전해준 메모는 '그녀는 예뻤다'였다. 그림을 그린 학생과 그림을 보고 해석하는 학생들의 시각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실제 원시 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해석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원시 미술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전해지는 무수하게 많은 예술품을 해석하면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다. 예술품을 감상할 때 아는 것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얘기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모르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느껴볼 수 있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고흐의 <아이리스>보다 더 좋은 자연

최근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불멸의 화가 고흐전'에서 고흐의 <아이리스>를 보면서 정효찬은 작품에 대한 감탄을 느끼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경험을 했다. 고흐의 예술혼과 강렬한 색의 떨림에서 느껴지는 감동 때문이 아니라 수첩과 볼펜을 들고 밀어닥친 수많은 인파에 떠밀려 저절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리스 고흐, 1890년, 반 고흐 미술관, 네덜란드
아이리스고흐, 1890년, 반 고흐 미술관, 네덜란드이다미디어

사람들에게 밀리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보고 느끼려 애써보았지만 결국은 밀려 밖으로 나온 저자는 경복궁을 거닐면서 예술이 아닌 자연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과 바람을 타고 작게 흔들리는 투명한 나뭇잎들.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그러다 문득 한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참 아름답다!"

위대한 거장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 수첩과 볼펜을 들고 도슨트의 해설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받아 적고, 몰래 사진도 찍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저자는 얘기한다.

그렇게 배우고 익힌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그렇게 배운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게 아니라 수첩과 볼펜을 이용해 듣고 적은 지식을 토대로 작품을 바라보도록 시선이 획일화된다.

조각을 전공한 저자 정효찬이 원시 예술부터 현대 예술까지 보여주는 예술의 다양한 모습은 그래서 참신하다. 기존의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느껴볼 수 있도록 독자들을 안내해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정효찬/이다미디어/2008.7.15/15,000원


덧붙이는 글 정효찬/이다미디어/2008.7.15/15,000원

미술 0교시

정효찬 지음,
이다미디어, 2008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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