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후에 만난 한 시중은행 외환분석팀장의 말이다. 그의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솔직했다. '정부의 고환율정책 실패 대가치고는 너무 큰 비용을 치른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땐, "그렇게 볼 수도 있다"면서도 "정부로서도 (물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강력한 외환시장 개입으로 원-달러 환율 상승이 주춤했지만, 앞으로 더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시장의 환율 오름세를 정부가 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한 마디로, "정부가 한여름밤의 헛된 꿈을 꾸었다"고 혹평했다. 그는 "정부가 환율을 시장의 흐름과 다르게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지난 한 달이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7일은 정부가 '환율과의 전쟁'을 선포한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다. 그동안 외환시장에선 보이지 않는 치열한 혈투가 벌어졌다. 환율이 약간이라도 오를 기미가 보이면 여지 없이 '달러폭탄'이 쏟아졌다.
S은행 외환운용팀 관계자는 "정부의 발표가 있은 후 하루이틀 정도 지나 환율이 1030원대에 이르자 외환당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내다 팔았던 것 같다"면서 "말 그대로 '달러 폭탄'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원-달러 환율이 한때 1030원 선을 넘어선 것은 지난달 9일. 정부는 시중은행 창구 등을 통해 대규모로 달러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외환시장에선 당시 정부에서 하루 기준으로 최고치인 60억~80억 달러 가량을 매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환율은 1000원대 아래로 급락했다.
그는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은 다각도로 진행됐으며, 상대적으로 거래가 뜸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달러를 기습적으로 내다 팔기도 했다"고 말했다.
물론 정부쪽의 외환시장 개입이 꼭 지난 한 달 동안 이뤄진 것은 아니다. 현 정부 들어 이른바 '강만수 효과'가 외환시장에 퍼지면서, 환율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강만수 효과'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후,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위해 환율 등 외환시장에 정부가 적극 개입할 수 있다는 발언에서 비롯됐다. 물가보다는 수출쪽에 무게를 뒀고, 이는 고환율 정책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 950원선을 들락날락하던 환율은 3월 들면서 1030원선까지 급등했다. 이어 4월 초까지 1000원대를 유지하던 원-달러 환율은 5월 들어 다시 급등, 지난 5월 27일엔 한때 1050원대까지 폭등했다.
하지만 이같은 고환율로 인해 수입되는 원자재 값이 크게 오르고, 이는 물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서민경제 파탄의 주범'이라는 비판이 이어졌고, '대리 경질' 논란속에 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최 차관은 강만수 장관과 함께 이른바 '환율주권론'을 내세우며, 고환율 정책을 적극 추진해 온 인물이다.
"고환율 정책 실패 대가로 10조원 이상 날린 셈"
지난 6월 들면서 정부는 정책기조를 '물가 안정'으로 바꿨고, 환율 상승을 막기 위한 정부의 때늦은 외환시장 개입은 계속됐다. 하지만 이 역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지난달 7일 한국은행까지 나서 '환율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부의 개입으로 원-달러 환율은 1000원선 아래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최근 다시 오르는 추세다. 5일 1달러당 1017원을 기록했으며, 6일엔 1016원에 거래됐다.
김두현 외환은행 외환운용팀 차장은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이후 시장에 대거 달러 물량을 풀어 놓으면서 상승세가 한풀 꺾이긴 했다"면서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양상이며, (환율이) 상승할 여지는 남아있다"고 말했다.
한달여 시간이 지난 후, 환율과의 전쟁 끝에 정부는 적지않은 상처를 입었다. 당장 외환 보유고가 크게 줄었다. 지난 6월 말 2581억달러였던 것이 불과 한달 사이에 2475억2000만달러로 줄어들었다. 한달새 105억8000만달러가 사라진 것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관리담당 임원은 "정부가 환율상승을 막기 위해 풀어놓은 달러가 150억 달러 이상, 200억 달러까지 된다는 말이 있다"면서 "그에 비하면 생각보다 적지만, 결코 적지 않은 돈"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정부가 안정기조로 정책을 바꾸면서, 고환율 정책으로 인한 대가로 10조원이 넘는 돈을 날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씁쓸해 했다.
달러 곳간 구멍 뚫리면서, '제2의 외환위기' 가능성도 제기
문제는 더 있다. 당장 정부가 10조원이 넘는 돈을 풀면서까지 외환시장에 개입했지만, 과연 언제까지 계속 할 것이냐이다. 한정된 외환보유고로 시장에 들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귀중한 외화만 날릴 것이라는 지적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한 마디로 밑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면서 "더이상 외환 시장 개입을 자제해야 하며, 자칫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시장에선 외환보유고를 둘러싼 각종 설(說)이 떠돌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일부에선 '제2의 외환위기설'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 대내외 여건도 좋지 않다. 외국에서 빌린 돈이 빌려준 돈보다 많아지면서, 올 하반기에는 우리나라가 순채무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총 외채 규모는 4125억달러. 이 가운데 1년 안에 갚아야 할 단기외채는 1765억 달러로 총 외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2.8%에 달한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9월 말 단기외채 비중 45.5%와 비슷한 수준이다.
또 외국인이 계속 국내 주식과 채권을 내다 파는 것도 불안하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시장 비중은 2000년 이후 처음으로 30% 아래로 떨어졌고, 채권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국은행 등 정부 쪽에선 외환위기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단기외채가 증가한 것은 조선업체 등 일부 기업의 환헤지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외환위기때와는 다르다"면서 "전체적인 외환 유동성도 우리와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도 양호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외적으로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외환보유고를 충분히 쌓고 시장의 불안감을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박해식 금융연구원 금융시장연구실장은 "현재와 같이 정부가 외화를 내다파는 방식의 개입을 무한정 할 수 없다"면서 "게다가 단기 외채가 많은 상황에서 외환보유고가 줄고 있는 것은 시장에 좋지 않은 신호가 될 수있다"고 말했다.
외환보유고는 환란(煥亂)을 막기위한 마지막 보루의 성격이 강하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 단기외채 급증, 물가폭등과 경기침체 등 대내외 경제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방패막 역할을 해온 외환보유고마저 약화될 경우 금융위기설은 '설(說)'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다.
2008.08.07 08:54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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