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인문연대의 미래형식>겉그림
한겨례출판
인간(人間)은 그 낱말이 겉으로 드러내는 의미 뿐 아니라 경험, 의의, 가치 모든 면에서 '관계'와 그대로 연결된다. '관계를 모르는 사람' 또는 '관계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범위를 더 넓혀 사람들의 공동체와 그 현장을 일컫는 사회에서도 인간 특유의 '관계'라는 특성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 관계, 그것은 인간으로서 숨 쉴 첫 번째 이유이자 근거가 된다.
그런데, 관계함으로써 살아가고 관계함으로써 말하는 인간이란 존재가 그 특유의 존재 이유인 관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거부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곧 자유로운 만남과 역시 자유로운 교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관계에 고정 틀을 집어넣으려는 우울한 시도가 발생할 때이다.
좀 더 좋은 관계가 아닌, 좀 더 확인 가능하고 점검 가능한 관계를 맺게 하고 결국에는 통제 가능성 수준까지 이끌어가는 이 관계의 부정적 변형을 우리는 '체제'라 부를 수 있다. 이렇듯 관계의 의미와 가치를 철저히 억압하고 변형하는 '체제'라는 것에 우리는 분명히 반항하고, 더 나아가 부정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관계로서 말하는 철학 그리고 실천하는 철학을 추구해 왔다는 인문학자요 철학자인 김영민. 그는 인문(人文)을 '인간의 무늬' 곧 인문(人紋)으로 정의하며 오래도록 인문학 공동체인 '장미와 주판'에서 이 문제를 살펴왔다.
인문(人紋)으로서의 인문학의 오늘과 내일을 그린 <동무론>은 이 시대의 알 수 없는 속내를 과감히 파고들 뿐 아니라 이 시대 '체제'의 속내에 알게 모르게 줏대 없이 동의(?!)해 온 우리를 조심스레 질타한다. 물론 그는 우리를 질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시 조심스레 대안을 제시하고 논의의 장으로 초대한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지은이의 오랜 사유 주제이기도 한 '동무론'이다.
왜 동무론인가, 왜 '동무'가 필요한 시대인가"간단히, '친구'는 '듣기' 이전의 상태요 그 관계다. 시공간의 동질성에 근거한 이 추억과 의리의 과거적 관계는 '듣지' 않고도 말한다. 심지어 그것은 구태여 공들여 '듣지 않고도 아는' 관계라는 사실을 과시한다. 그러나 좋은 선생이 '듣기'로써 학생의 창조성, 그 은폐된 가능성을 일깨우는 '생산적 권위'일 수 있듯이, 좋은 '동무'란,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들을 불러세우는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 속에서 (부사적으로) 자생한다."(이 책, 211)
관계의 의미는 물론 각각의 실제 관계를 곱씹고 성숙시켜 갈 틈을 허락하지 않는 이 시대 세속의 트랙. 많은 이들은, 뻔히 다 보이기도 하면서 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되는 세속의 트랙을 뱅뱅 도는 일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경우에는 사실상 강제로) 거기서 배제될 뿐이다. 사실상 선택이란 없는 이 시대 세속의 풍경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그 덩치를 더욱 키워간다. 여기에 '이의있음'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
그런 세상과 이별하는 것 또는 (자본주의적 체제에 딸려 연명하는) 세속이라 일컫는 세상살이를 벗어나 사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고 있고 또 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물론 부러움으로 가득한 우울한 시선은 어느새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한 세속의 바람에 흩날려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속절없이 세속(의 틀과 목표)을 따라가야 할 우리 자신뿐이다.
"세속이란, 어리석음을 매개로 하는 인간들의 관계망을 가리킨다. 정확히 짚자면, 그것은 오직 어리석음을 매개로 할 때에만 가능해지는 관계망이다. 좀 더 정확히 짚자면, 세속은 어리석음이라는 그 매개가 실재로 변화하는 변신(變身)의 우화(寓話)인 것이다."(이 책, 194)이 시대 세속의 목을 틀어쥔 자본주의적 체제는 인간 특유의 관계를 얼마든지 '분리'로 만들어버리고 기껏해야 통제된 관계를 허락한다. 이러한 체제 아래 사는 모든 것(인간)은 본래 관계 맺어야 할 대상과는 사실상 분리되고 차라리 체제가 허락하는 대상에만 반응하는 기계적 관계, 무의미한 관계, 억압된 관계, 결국 관계도 아닌 관계를 맺고 산다.
체제를 벗어나 체제를 바라보는 일을 시도하지 않는 한 체제 특유의 특성인 통제와 명령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왜곡하는) 분리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을 게다. 말하자면, 체제 내 관계는 그저 무의미한 나르시시즘의 반복과 확산으로 귀결될 뿐이다.
결국, 이러한 특성을 지닌 오늘날의 세속을 사는 우리가 지녀야 할 관계는 이 시대의 특성을 감안한 새로운 의미의 관계여야 한다. 지은이 김영민은 시대의 왜곡과 변형을 감안하여 시대 한계를 뛰어넘고 관계의 본래 의미를 되찾는 일을 시도했는데, 그것을 책이라는 형태로 엮어내어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그의 바람을 전하려 한 시도가 바로 <동무론>이다. 그러고 보니, 지은이 김영민은 지금까지는 그다지 보기 어려웠던, 그러나 끊임없이 찾아내고 형성하고 진지하게 이끌어가야 할 '동무'를 발견하길 원한다.
인문연대의 힘, 끈끈한 친밀함이 아니라 서늘한 신뢰가 필요하다이렇게 그는, 제대로 된 인문(人紋)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문학(人文學)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하고 다듬어감으로써 시대의 울부짖음과 요청에 응답하려 했다. 그렇기에 그가 찾는 벗 곧 '동무'는 그 의미부터 남다르다.
"벗을 사귐에 '틈'이 가장 중요하다. 둘이서 무릎을 맞대고 자리에 나란히 않았다 해서 서로 밀접하다고 할 수 없고, 어깨를 치며 소매를 붙잡았다 해서 서로 합쳤다 할 수 없으니, 그 사이에 틈이 있을 뿐"이라는 연암(燕岩) 박지원의 말은 그대로 김영민의 말이 된다.
"신뢰는 무엇보다도 사회성의 가치, 사적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객관성의 가치를 가리킨다. 동일시의 심리적 내재화로부터 서늘한 거리를 둘 수 있는 인문적 성숙의 가치를 말한다. 기분과 심리주의적 직관을 포함해서 사적 원칙에 기인한 갖은 기대를 접어둘 수 있는 능력, 혹은 실천적 지혜를 가리킨다."(이 책, 283)'체제'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속 아래 사는 것은 다분히 굴욕이며 억압이며 그 자체가 인간 특유의 관계를 왜곡하는 일이다. 게다가 그것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 무한히 반복하는 특성을 지닌다. 더욱 암울한 것은 누군가 이 현상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면 (스스로) 뒤집어지며 거짓 변화를 하는 뫼비우스식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김영민의 <동무론>을 읽으며 살펴본 이 시대의 무례함은 그 특유의 왜곡 뿐 아니라 이렇듯 거짓 변화를 당당히 광고하는 태도에도 있다. 그래서 거듭 말하지만, 그가 찾는 '동무'는 체제 아래 묶인 채 뜨거운 열정을 분출하는 이가 아니라 차라리 체제를 벗어나서 보는(내려다보는 또는 비켜나서 보는) 이를 말한다.
이것이 일면 패배를 뜻할지라도, 그는 "자본제적 삶과의 창의적 불화"를 할 수 있는(또는 하길 원하는) 이들을 '동무'로 삼고 그렇게 부른다.
이렇듯 김영민의 '동무'는 시대(의 요구)와 과감히 (일정 기간이나마) 불화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발견한다. 그의 '동무'는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체제의 요구를 끊임없이 들으며 사는) 친밀함으로 묶인 관계보다는 차라리 (그의 표현대로라면) '서늘함'을 사이에 둔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의 다른 표현으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관계이다. 한편,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그의 '동무'론에 (어느 정도) 참여할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지점에서부터 이 책의 가치는 극과 극을 달리게 된다.
"지는 방식, 혹은 무능의 어떤 것 속에서 인문은 오히려 타락한 현재의 공시와 세속의 통시를 고스란히, 힘없이, 그러나 미증유의 비판적 풍경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 타락한 세속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희생양들의 속절없는 죽음과 그 무능은, 역사귀류법적 진실이 되어 그 모든 희생된 가치의 비판적 무게로써 자본주의적 유능을 내리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 459)"그러니까, 내가 말하려는 급진성이란 그간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띄엄띄엄 예시되기도 했던 인문(人紋)의 능력(혹은, '본령')인 셈이지만, 나는, 이 능력이 아무나의 생활양식의 무의식을 통해 스스로를 잊어버리는(혹은, 알면서 모른 체하는) 일상화의 가능성 속에서 미래 인문학의 지평을 캐내려고 한다."(이 책, 473)무한왜곡을 무한 반복하는 '체제' 아래서, 사람들이 맺는 관계란 그저 (그 속을 알 수 없는) '호의'와 '호감'을 바탕으로 하여 (언제든 폐기와 왜곡이 수시로 가능한) 이루는 사적 관계이다. 그렇다 보니, 시대를 거머쥔 것의 속내를 알면 알수록 그 '체제' 아래 형성되는 각종 호의와 호감 그리고 친밀함에 '이의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친밀함보다는 서늘함을 그리고 끈끈함보다는 (빈)틈을 동력으로 삼는 '동무'가 이 시대에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영민은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을 찾아보겠다는 어려운 목적을 품에 안은 채 '동무'들을 찾고 교제하는 데 오랜 세월을 기꺼이 바쳤다. 그 켭켭히 쌓인 뜨거운 세월들을 묵묵히 지나온 그는 이 책에서 "욕심의 영동(零度)에서 다시금 얻는 '하아얀 욕심'으로서의 의욕, 그것은 내게 자본제적 삶과의 창의적인 불화를 알리는 미래적 인문주의의 신호이자 동력"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김영민의 <동무론>은 지금도 인문(人紋)으로서의 인문(人文)을 살피고, 그것들의 '서늘한' 연대를 통해 인문학의 미래를 꿈꾼다. 아무런 해석도 반응도 없이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체제를 극복할 의사가 없는 것이므로, 그는 이를 결단코 반대한다. 그의 주장과 확신대로라면, '동무'들의 '서늘한' 교제는 이 시대의 뜨거운(!) 부르짖음과 요구에 응답할 사명을 지닌다. 또한, 시대의 요구 한복판을 묵묵히 걷는 '무능의 급진성'은 역설적으로 인문학의 미래를 더욱 뚜렷하게 한다.
그의 새 인문학 곧 인문학의 미래는 마치 '지는 싸움' 같지만 오히려 역으로 이 시대의 검은 속내를 드러내는 성과를 올린다. 그는 이러한 새 인문학의 미래가 진지하게 뿌리내리길 바라며 꾸준히 '동무'의 길을 걷고 탐구해왔다. 때마침, '동무론'을 이끌어내기까지 1장 내내 거듭 쌓인 그의 '반우'(흉터 반, 혹 우)가 새삼 달리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동무론> 김영민 지음. 한계레출판, 2008. 25000원
1. 인문학 공동체 '장미와 주판-걸으면서 철학하는 사람들'('장주')는 www.sophy.pe.kr에서 볼 수 있다.
2. 김영민의 활동 및 저작에 관한 내용을 jk.ne.kr에서 볼 수 있으며, '장주'가 연결되어 있다.
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김영민 지음,
한겨레출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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