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판도라 상자' 강제로 열리고 있다

서울고법 '노 전 대통령 지정기록물' 37만건 영장 발부... 후손들 피해

등록 2008.08.22 13:28수정 2008.08.2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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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말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는 판도라가 뚜껑을 열자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惡)을 세상에 쏟아내었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껑을 닫았는데, 이때 희망은 빠져 나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인간들은 희망을 제외한 여러 가지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신화로만 생각되는 이 이야기는 그리스가 아닌,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가 기록을 남기겠는가

 

검찰은 지난 21일 고등법원으로부터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하드디스크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았다. 이로써 대통령기록관에 보존하고 있는 37만여 건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정기록물에 대한 보호는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온갖 기록의 내용이 고스란히 공개되는 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만큼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의 소용돌이가 대한민국을 휘감을 수도 있다.

 

이번 검찰에 의한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우선 이번 사태로 현 대통령이나 후임 대통령들은 민감한 대통령기록에 대해 기록 자체를 생산하지 않거나 생산하더라도 불법유출 및 무단파기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통령지정기록물은 그 자체가 매우 민감한 기록이자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a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지난 7월 1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 들어서고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지난 7월 1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 들어서고 있다. ⓒ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지난 7월 1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 들어서고 있다. ⓒ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

 

대통령기록물법 제17조(대통령지정기록물의 보호)에는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지정할 수 있는 범위를 ▲정무직공무원 인사에 관한 기록물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기록물로서 공개될 경우 생명·신체·재산 및 명예에 침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기록물 ▲대통령과 대통령의 보좌기관 및 자문기관 사이 등에 생산된 의사소통기록물로서 공개가 부적절한 기록물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을 표현한 기록물로서 공개될 경우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기록물로 한정하고 있다.

 

법률에서도 적시하고 있지만 대통령지정기록물 자체를 개인의 명예를 침해하거나 정치적으로 혼란을 부추길 수 있는 기록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가 후임 대통령들에게는 반대로 대통령지정기록물과 같은 기록을 남기면 안 된다는 모범 사례이자 선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이 남기지 않아 발생하는 그 피해는 우리 국민들뿐만 아니라 후세에 고스란히 돌아 올 것이다.

 

두 번째로 대통령지정기록물 전체에 대한 영장을 발부할 수 있는지도 대단히 의문이다. 대통령기록물법 제17조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범위를 보면 "관할 고등법원장이 해당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중요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발부한 영장이 제시된 경우" 에 한해서 영장을 발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단서조항에는 "관할 고등법원장은 열람, 사본제작 및 자료제출이 국가안전보장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거나 외교관계 및 국민경제의 안정을 심대하게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등에는 영장을 발부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앞에서는 중요한 증거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영장을 발부하도록 하고 있지만 국가안전보장 및 외교관계, 그리고 국민경제 안정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을 때에는 영장을 발부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런 조항을 두고 있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영장을 발부하더라도 그 범위를 최소화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 영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37만여 건의 지정기록물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 37만여 건의 지정기록물 중에는 위와 같은 사항에 해당하는 민감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명백히 영장 청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자 법률취지에 위배되고 있는 것이다. 37만여 건의 지정기록물에는 분명 민감한 내용의 기록이 상당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지정기록물의 내용이 정치권으로 넘어간다면 우리사회는 엄청난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전자기록의 원본 및 사본 개념은 무의미한데...

 

a  7월 13일 정진철 국가기록원장(왼쪽 두번째)이 임상경 대통령기록관장, 국가기록원 관계자 2명 등과 함께 김해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사저 방문 조사 후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7월 13일 정진철 국가기록원장(왼쪽 두번째)이 임상경 대통령기록관장, 국가기록원 관계자 2명 등과 함께 김해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사저 방문 조사 후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 황방열

7월 13일 정진철 국가기록원장(왼쪽 두번째)이 임상경 대통령기록관장, 국가기록원 관계자 2명 등과 함께 김해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사저 방문 조사 후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 황방열

 

셋째, 검찰은 이번 영장 청구의 이유를 "대통령기록관 자료와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가져갔다가 반납한 하드디스크 자료가 일치하는지 시리얼 넘버 등을 비교 분석하겠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봉하마을 측에서 가져간 기록의 원본 여부를 밝히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전자기록의 원본 및 사본 개념은 기록학계에서는 논쟁의 수준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안이다. 왜냐하면 종이기록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육안으로 식별이 용이하기 때문에 내용, 서명, 관인 등이 물리적으로 동일하지를 판단하기가 비교적 쉽다. 또한 종이는 장기보존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매체이기 때문에, 이것이 '원본'이라는 개념으로 당연하고 손쉽게 받아들여진다. 즉, 종이기록의 경우에는 원본 및 사본의 개념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기록은 생산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변화하며(바이트의 변화, 이관 등) 물리적으로 취약하고(파일이 자체가 삭제될 가능성), 내용 카피 역시 매우 수월한 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문서의 증거능력을 입증하는 요소가 내용과 별도의 구조와 기술적 장치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자기록은 여러 가지 증명을 거쳐 장기적인 증거능력을 입증하는 요소 처리와 그 과정의 투명화가 담보된 조치를 거친, 즉 '정당한 변환'을 거쳐야만 진정성을 갖춘 '진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전자기록의 원본 및 사본 개념은 무의미하며, 대신 진본 및 사본 개념만 존재할 뿐이다. 현재 대통령기록물의 진본은 여러 가지 인증장치를 갖추고 있는 대통령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들뿐이다. 따라서 검찰은 봉하마을로 가져간 대통령기록 사본이 대통령기록물법 제14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누구든지 무단으로 대통령기록물을 파기·손상·은닉·멸실 또는 유출하거나 국외로 반출하여서는 아니 된다"에 해당되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따라서 검찰에서 시리얼 넘버를 대조하겠다는 뜻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과도한 수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기록관리 암흑기로 들어가나 

 

a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13일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한 국가기록원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13일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한 국가기록원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13일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한 국가기록원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은 이번사태로 인해 전직대통령을 우리사회의 원로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문화가 다시 한번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를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바 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봉하마을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논쟁의 한 중간에 서게 만들었다.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이런 갈등은 정치 불신이 만연되어 있는 우리사회에 정치를 더욱 혐오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정치권과 검찰은 이번 사태를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기록을 남기지 않는 문화가 급속도록 확산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그 피해는 국민들과 우리 후손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 대통령기록관에는 노무현 대통령기록 이외에 제대로 된 전직 대통령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우리사회의 현실이자 비극인 것이다. 그나마 노무현 대통령은 기록보존에 대한 열정과 애정으로 수많은 기록을 남겼고, 그것은 우리사회에 엄청난 자산이 됐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사회가 기록관리의 암흑기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역사가 반복된다면 어느 대통령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기록을 남기겠는가?

 

이번 사건에 중심에 있는 국가기록원과 검찰에 기록관리를 전공한 기록관리학 전공자로서 되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전진한 기자는 (사)한국국가기록연구원 선임연구원이자 (가칭)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준비위원입니다.

2008.08.22 13:28ⓒ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전진한 기자는 (사)한국국가기록연구원 선임연구원이자 (가칭)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준비위원입니다.
#대통령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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