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24일 태극기를 앞세운 마지막 황세손의 운구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원정연
총독부 돈으로 이준열사 참배하겠다고?나민혜는 마침내 파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림과 불어를 둘 다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파리에 장기 숙소를 마련했다. 그런데 남편이 공무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녀는 따라 나섰다. 헤이그에 도착한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준 열사의 묘에 참배하고 싶어요."
박우진은 갑자기 밸이 틀어졌다. 그녀가 이준 열사 묘를 참배하겠다는 속셈을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는 나민혜를 철없이 허둥대는 순진한 여자로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한국 신문에 쓸 거리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박우진은 한국에서 편히 살면서 애국자연 또는 선각자연 하는 사람들이란 자기 아내와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총독부 돈으로 여행하면서 이준 열사를 참배하겠다고?' 그는 이런 말이 막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나는 영사관에 가 보아야 하니 당신 혼자서 가시오."
박우진이 저녁 무렵에 들어오니 나민혜는, "아무리 물어 보아도 아는 이가 없어 포기했어요"라고 말했다.
박우진은 치밀어 오르는 경멸감을 표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그는 말했다.
"나는 베를린에서 내 전공을 연구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나민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는 파리에 있겠어요. 파리를 포기할 수 없어요."
나민혜는 동양에 호감을 갖고 있는 수왈레라는 사람의 집에 6개월 정도 머무르기로 했다. 1남 2녀를 두고 있는 수왈레 부부는 사회 활동도 왕성하게 하고 있었다. 남편 수왈레 씨는 약소민족지원회 부회장이었고, 수왈레 부인은 여성 참정권을 위한 시민 단체의 회원이었다.
그들은 다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나민혜는 가사와 양육과 시집 모시기에 여념이 없는 조선의 여인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조선의 여자들은 자아를 말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 여인의 삶은 다르다고 여겼다. 그들은 생존과 생활의 수준을 넘어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 들어가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민혜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그림을 한다는 이유 하나로 가사와 양육과 시집 모시기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인 부부는 가정부나 파출부 없이 1남 2녀를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수왈레 부인은 경제적인 이유로 동양에서 온 여자 하나를 홈스테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으로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민혜는 그림에 몰두하다가도 주인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나 거리 연인들의 사랑 표현 장면을 보면 외롭고 쓸쓸해지고는 했다. 이럴 때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 최린이었다. 최린은 미국에 갔다가 무슨 일인지 앞당겨 파리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최린을 안내한답시고 매일 그를 만났다.
그녀에게 파리의 가을은 아주 로맨틱했다. 최린과 바람을 피우는 그녀에게는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나민혜는 자신의 모험이 남편을 자극해 사랑을 더 두텁게 해 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그것은 진보된 여성이라면 마땅히 생길 감정이라고도 그녀는 여기고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떠나는 최린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겠습니다."
최린은 나민혜의 등을 다사롭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과연 진정한 신여성다운 말이오."
하지만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두 사람은 다 알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 작자 김갑수는 최근 전작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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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인간] 객지에서 죽음 맞은 마지막 황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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