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 평면도일제가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웠던 신궁이라는 가장 높은 사격을 가진 신사
이기원
눈 감고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쌀 생산량이 증가했고, 공업화가 진행되어 식민지가 되기 전보다 다양한 물건이 다량으로 생산되었다. 경성 거리에는 자동차가 늘어났고, 경성의 밤거리는 전깃불로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런데 그건 누구를 위한 변화였을까. 일본의 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 결과 쌀 생산량은 증가했다. 하지만 정작 쌀을 생산하던 식민지 농민들의 쌀 소비량은 감소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으로 연명해야만 했다.
경성 거리에 늘어난 자동차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가난한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건을 사서 쓸 수 있는 사람들 역시 한정되어 있었다. 가난한 식민지 민중들은 공장에서 일본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위험하고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다.
경성 밤거리를 밝히는 휘황한 전기 또한 가난한 식민지 민중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까맣게 그을음 올라가는 등잔불도 기름값 무서워 마음 놓고 켜지 못했으니까. 토지조사사업으로 쫓겨나고 산미증식계획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정든 땅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갔다. 간도로 연해주로 만주로 일본으로.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간도에서는 간도 참변으로, 연해주에서는 자유시 참변으로, 일본에서는 관동 대학살로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떠날 수도 없어 남아 버티는 사람들의 삶도 비참했다. 1932년 일본인 기자가 쓴 글을 읽어보자.
우리가 농촌에서 보고들은 것은 아무리 말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 많다. … 가난한 농민의 식량을 참고로 봐도 한 홉 정도에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섞어 끓여서 먹는다. 봄에는 풀의 새싹을 겨울에는 뿌리를 채굴한다. 나무껍질은 소나무 속껍질, 아카시아, 기타 모든 껍질을 잘게 하거나 도토리 열매로 가루를 낸 후 물을 넣어 단자(團子)를 만들고 소금을 쳐서 먹는다. 어떤 지방에서는 고령토를 먹는 경우도 있다. 그 상태는 일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비참하고 진기한 현상이다.(내외사정, 1932)사정이 이런대도 일제 식민지 지배가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지배 때문에 쥐꼬리만한 권세 누렸던 친일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친일파를 친일파라 부르지 못하던 시절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 그들은 다시 권력의 핵심이 되어 각종 기득권을 독차지했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독립 운동을 했던 사람 곁에 이름 석 자 적어 넣어 마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인 것처럼 위장도 하고, 반대 세력에게 좌경이란 재갈을 물려 옴짝달싹도 못하게 했다. 당연히 국민들의 지지도는 점점 떨어졌다.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이 갈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었다. 독재로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