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쪽에서는 이 지역 중년 아주머니들이 당파를 캐고 있다. 당파는 일반적으로 김치를 담그거나 반찬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당파는 뽑기도 쉽고 부피도 커서 작업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여유 반 호기심 반으로 우리들을 쳐다본다. 예전 같으면 발굴자와 연구자들만이 찾았는데 이제는 답사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니 이분들에게도 호기심이 생길만 하다.
보원사지 유물전시관은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기 위한 가건물이다. 한쪽 벽 앞에서는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 직원들이 유물 세척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지에서 수습된 유물들을 물에 닦아 말리는 것이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것은 주로 기와조각이다. 사소해 보이는 와편이지만 이들에서는 무늬도 확인할 수 있고 명문도 확인할 수 있다. 무늬와 명문 때문에 이들은 유물로서의 가치가 훨씬 높아지는 것이다.
유물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보원사지 전경 사진이 걸려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최근(2008년 7월) 국립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발굴조사 안내 자료가 비치되어 있다. 제목이 '2008년 서산 보원사지 발굴조사'인 8페이지짜리 팸플릿이다. 그렇지만 학술성이 돋보이는 아주 잘 만들어진 자료이다. 이 자료는 발굴조사 현황, 유구현황도, 조사구역, 출토유물, 뉴스레터의 5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보원사는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왜냐하면 전라도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창성탑비에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태화(太和) 정미년에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화 정미는 827년이 되고 가량협산 보원사는 현재의 가야산 보원사가 된다. 그렇다면 보원사는 827년에 이미 유명한 절로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보원사는 유물로 보면 백제시대에, 기록으로 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보원사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은 앞의 연재에서 언급한 법인국사 탄문의 보승탑비이다. 법인국사는 화엄종 계열의 선사로 보원사의 전성기를 구가한 스님이다. 이후 보원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나온다. 1306년 보원사 계단(戒壇)에서 경율시험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서산과 태안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지방지 성격을 갖는 <호산록(湖山錄)>(1619년)에 따르면 조선 중기에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뀐다. 강당사에서는 <묘법연화경> 등 불교경전이 인쇄되어 여전히 활발한 포교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층의 법당과 부도전, 나한전 등 당우가 여러 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세도 여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71년에 나온 <호서읍지>에는 보원사 철조여래좌상의 양손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보원사가 조선 후기 퇴락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나온 <조선고적도보>에 보면 보원사지에는 석조물들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1900년 전후 시대의 격변 속에서 보원사는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반세기가 지난 1968년 이 지역에서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서산 보원사지 유물전시관
보원사지 유물전시관은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사방에 유물이 가득하다.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다. 대부분이 식과 주를 위해 사용되었던 물건들이다. 유물로는 수막새, 암막새, 평기와, 치미, 벽돌 등 건축에 사용되었던 것들이 가장 많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청동 주자, 백자 접시, 백자병, 토기호, 당초문병 등 생활에 사용되던 용기들이다.
수막새는 연화문이 대부분이고 귀목문이 약간 보인다. 여기서 귀목문이란 도깨비의 눈을 말하는데 귀목문은 대개 고려시대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연화문도 다양해서 단엽, 중엽, 복엽이 있고, 단판과 중판이 있다. 위의 사진 왼쪽에 있는 것이 단엽중판 연화문이고, 가운데 것이 중엽단판 연화문이며, 오른쪽 것이 단엽단판 연화문이다.
암막새는 당초문, 보상화문, 초화문, 용문이 가장 많다. 그 외 귀목문, 범자문, 포도당초문이 보인다. 평기와도 역시 문양에 따라 초화문, 청해파문, 격자문, 어골문, 집선문 등으로 나눠진다. 이들 기와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기도 한데 대표적인 명문이 보원사(普願寺), 동(東), 대(大), 삼보(三寶)이다. 또한 발굴과정에서 치미가 발견되었는데, 위로 치솟은 형상에 반원형 줄이 선명하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보상화문이 새겨진 얇은 판이다. 이것의 공식 명칭은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이다.
절에서 쓰던 생활용기로 가장 흔한 것은 백자 대접과 접시이다. 이들은 예술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지만 당시 절의 생활수준을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이에 비해 당초문병과 백자호 그리고 청동 주자 등은 예술성이 높아 보인다. 이들은 아마 생활용기라기 보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데 쓰는 일종의 제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 외 유물로는 짙은 회색의 토기호나 토기병이 있다.
보원사지 유물전시관은 현장에 있는 임시 박물관이지만 유물의 구성이나 배치를 아주 훌륭하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와와 생활용기를 유형에 따라 잘 구분해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기와의 모양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역사의 진실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배우는 즐거움도 준다. 그런 의미에서 보원사지 유물전시관은 임시 박물관의 성공 사례이다.
2008.10.01 08:18 | ⓒ 2008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