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권우성
정운현(이하 '정') "이제 이야기를 바꿔보겠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평전을 연재하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젊은 독자들한테는 낯선 분일 것입니다. 알 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젊은 독자들을 위해서 장준하 선생이 어떤 분인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삼웅(이하 '김') "우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1918년생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에 태어났는데요, 일본에 유학을 가서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끌려갔습니다. 평양에서 3개월 동안 훈련받았는데, 그때 몸이 좋지 않았지만 중국 쪽으로 파견이 못될까봐 아주 용감하게 '나, 몸 아프지 않다, 중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며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저 사람 친일파가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지요. 즉 중국으로 가서 일본군을 탈출해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한 겁니다. 실제로 일본군을 탈출해서 90일 동안 무려 6천리를 걸어서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길에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고대 총장을 하셨던 김준엽 박사, 현 광복군 회장 김유길 선생, 전 광복회 회장 김우전 선생, 윤경빈 선생 등이 당시 동료입니다. 어떤 때는 중국의 산적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했고. 또 어떤 때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산을 넘다가 호랑이밥이 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임시정부에 가서 미군과 함께 OSS훈련을 받으면서 잡지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1945년 해방되던 해 8월 17일 미군기를 타고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여의도공항에 도착했는데, 당시 대장은 이범석 장군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되던 해인 1975년 8월 17일 의문사를 당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상계>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정 "관장님께서는 장준하 선생이 발행한 장준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계>에서 신인논문상(가작)을 수상하신 것을 계기로 해서 저는 문필활동을 시작하셨다고 보입니다. 생전에 장준하 선생과 개인적인 친분이나 교류도 상당히 있으셨죠?"
김 "그렇습니다. 우선 젊었을 때부터 <사상계>를 충실히 읽은 독자였고, <민주선전> 기자를 하면서 장준하 선생을 많이 좋아해서 산행할 때도 여러 번 같이 갔었습니다. 또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가 폐간된 후에 함석헌 선생이 하셨던 <씨알의 소리>의 편집위원이었습니다. 편집위원 회의할 때 제가 기록을 위해서 여러 차례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는 어떻게 살았나, 평전에서 이름 밝힐 것"
정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 정권 때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셨는데요, 이번 평전에서는 이런 의문사 대목이나 내용도 당연히 포함이 되겠죠?
김 "그 부분에 대해서 장준하 선생이 참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국민, 지금 40~50, 60대 되는 국민이라면 장준하 선생한테 빚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깨어있는 지식인이라고 하면 말입니다. 그런 분이 의문사를 당했고, 2002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규명 불능' 판정을 내렸습니다.
선생이 의문사를 당한 그 다음 날 저는 사고현장에 가봤고, 또 그 다음 날에도 가봤습니다. 한 달 후에 저희 60명 정도가 돈을 조금씩 걷어서 현지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총 7번 정도 사고 현장에 가봤는데, 거기 바위가 15m, 경사가 75도 정도 되고 더욱이 8월 17일이면 장마철인데 바위가 미끄러워 거기서 내려온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또 거기서 추락했다고 하면 상처라던가 하다못해 옷에 이끼들이 끼어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 커피를 좋아하셔서 커피통을 가지고 갔는데 그건 멀쩡하고. 저희가 산에 올라가서 돌을 던져 보니까 박살이 나더라구요.
그런데 (장 선생은)외상이 하나도 없었고, 왼쪽 귀밑에만 예리한 망치 같은 걸로 맞은 것 같은 상처밖에 없었거든요. 그 때 당시 유일한 목격자로 김모씨가 있었습니다. 평전에서는 이름도 밝히겠지만, 그는 자기 삼촌이 6.25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대학을 나와서도 취직을 못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장준하 선생 선거 때 조금 도와줬다가 그 후에는 전혀 안 나타나더니만 (그날) 산행 때 우연히 (장 선생과) 같이 산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돌아가신 장 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사고 후 그는 충청남도 당진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취업했습니다."
정 "단언하기 어렵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장 선생이 현지에서 실족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타살되어 약사봉 계곡으로 옮겨졌다는 추론이 가능하겠네요?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유족들과 후학들이 선생의 목숨과 같은 <사상계>를 다시 인터넷판으로 내서 한동안 활동을 하다가 최근에는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대중들의 호응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사상계>와 같은 정론 시사교양지가 필요한 거 아닙니까?"
김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낼 때가 1953년입니다. 53년이면 6.25 전쟁을 한참 하던 때거든요.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인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제작비가 없어서 부인이 자신의 혼수품을 팔아서 제작비를 댈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라던가 인권이라던가 국제정세라던가 이런 것들은 <사상계>에서 영향 받은 바가 참 큽니다. 저는 감히 4.19혁명, 6.3사태, 70~80년대 민주화 운동 이런 것은 <사상계>가 뿌린 그런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이런 싹이 성장한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상계> 같은 지성지, 국민의 지성과 양식을 대변하는 잡지를 냈는데 지금 시대에 온갖 매체들이 많고, 더러는 국민을 현혹하고 곡필을 일삼는 언론이 주류언론이 되고 있는,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데 글을 쓰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역사를 위해서, 또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서, 우리 후대를 위해서도 장준하 선생이 하셨던 <사상계> 같은 잡지는 국민모금을 모아서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장준하 선생이 지하에서라도 눈을 감고 영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봉암·리영희 선생, 김대중 전 대통령... 평전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