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지기와 아기몸이 나아진 옆지기는 비로소 묵주 매듭 꿰기를 다시 합니다. 앉아서 오래도록 해야 하는 일이라, 아기는 옆에 두고. 저도 가까이에서 글쓰기나 책읽기를 하면서 함께 아이를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최종규
- 날짜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산다. 오늘 새벽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발 느긋하게 뻗고 쉬는 때란 잠깐도 없다. 조금 곁을 낼 수 있을 때라면, 밀려 있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집안일을 한다.
쌓여 있는 기저귀가 있으면 기저귀 빨래를 한다. 기저귀 빨래를 하는 사이, 아기가 깨기라도 하면 저와 함께 놀아 달라면서 운다. 처음에는 한두 마디 짤막하게 끊어지는 낮은 소리로. 차츰차츰 길며 높아지는 목소리로.
쉰 날을 맞이하기 앞서까지만 해도 옆지기 몸이 몹시 안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배앓이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 가서 모진 의사 손을 거쳐서 아기가 태어나느라 아기와 옆지기 모두 몸과 마음이 다치기도 했지만, 옆지기가 제 몸을 되찾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이를 지켜본 장모님이나 이웃 할머니나 ‘백일이 괜히 백일이 아니라, 아기와 엄마가 몸을 되찾는 시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진작부터 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처음 겪어 보는 우리들로서는 이런 대목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아니 헤아릴 수 없었다. 첫 세이레 동안 아기를 지키고 옆지기 어긋난 뼈가 제자리를 찾는 데까지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대목쯤은 알았으나, 그토록 몸풀이가 오래 끌게 될 줄은 알 수 없었다. 어떠한 책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고, 어느 자료에서도 이렇게 백일에 걸쳐서 아기와 애 엄마 몸풀이를 돕고 이끌어야 한다는 소리는 없었다.
왜 육아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을까. 왜 초중고등학교 성교육 때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가르쳐 주는 교사들부터 겪어 보지 못해서 못 들려주었을까.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된다고 생각하며 대충 넘겼을까. 푸름이들 눈길과 생각은 ‘사랑놀이’에 맞춰질 뿐, 아기를 몸에 안고 열 달이라는 삶을 배로 품어낸 다음 세상으로 받아들여서 천천히 세상과 한몸이 되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을까.
생각해 보면, 지난날에는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따로 책을 살피지 않아도 집안이 큰식구였기 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거들어 주고 이끌어 주고 도움을 베풀었다.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었고, 아이를 낳는 동안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기 몸과 어머니 몸을 시나브로 다시 배우게 된다. 무엇을 해 먹이고, 어떻게 해 먹이며, 집은 어떻게 꾸미고, 집식구들은 어떻게 매무새를 다스려야 하는가를, 집안 어르신이 차근차근 가르치고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시골도 도시도 큰식구로 살아가기 어려운 한편, 자식뿐 아니라 부모 스스로도 딴살림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따로따로 산다. 모두들 제 삶을 저희끼리 홀로 이끌려고 한다. 아기를 낳는 한동안, 아기를 낳고서 얼마쯤 일손을 거들는지 모르나, 일손 거들기를 넘어서 아이 삶과 애 어머니 삶을 깊이 들여다보도록 마음을 틔워 주기까지는 못한다. 그러니 책을 찾아볼 밖에 없고, 인터넷이라도 뒤져야 하는데,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찾기란 너무도 고달픈 일.
나라에서는, 아기를 집에서 낳으면 돈 얼마를 준다고 하고, 셋째를 낳을 때부터 몇 십만 원을 준다고 하지만, 이런 돈보다도 ‘제대로 된 아이 키우기 정보와 지식’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틀거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나 싶다. 아이를 막 낳을 때를 비롯해서 아이를 낳고 집에서 고이고이 기르는 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가 자라는 달수와 날수에 맞추어 아이 몸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면 좋을지를 찬찬히 보여주고 알려주는 ‘진짜 산모수첩’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