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주의의 귀환을 마냥 반길 수 없는 까닭

신자유주의가 저절로 막을 내릴까?

등록 2008.10.17 18:19수정 2008.10.1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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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 미 워싱턴 D.C에서 열린 IMF 선진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부시대통령. 왼쪽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왼쪽은 귀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
10일 미 워싱턴 D.C에서 열린 IMF 선진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부시대통령. 왼쪽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왼쪽은 귀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 EPA=연합뉴스

지금의 세계적 금융위기를 1929년의 대공황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대공황 이전의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케인즈주의적 수정자본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던 것처럼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넘쳐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놓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들 주관적 희망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이제 끝장나는 것 아니냐는 의견에서부터 금융 주도 글로벌 축적체제가 끝장나는 것 아니냐는 의견, 일시적 위기일 뿐 금융시장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는 의견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고 있는데, 관심사는 진보진영의 현 위기에 대한 분석과 대응 방향이다.

금융시장 자본주의는 파산한 것인가?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해졌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이번에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기까지 했는데, 그의 호들갑이 그리 진지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프랑스와 독일도 미국식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종식과 새로운 금융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사실은 국제 금융질서의 주도권 재편을 노린 발상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국가와 시장의 새로운 균형"을 말했을 뿐, 무슨 대단히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게 아니다.

자본주의가 끝장을 보고 있으니 이제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선동하자는 이야기는 일단 논외로 하고,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만 우선 간단하게 살펴보자.

제조업이 약한 미국 경제가 미국 GNP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금융산업을 대폭 손질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월가의 주요 투자은행들이 몰락한 것은 맞지만, 이들 투자은행의 기능은 기존의 상업은행과 결합하여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다.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 강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그 자체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대규모의 공적자금 투입과 부분 국유화 논의는 대규모의 체질전환을 위한 예고편이라기보다 물에 빠진 기업들을 일단 살리고 보자는 식의 임기응변책에 불과하다. 미국 정부 스스로도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금융산업에 대한 감독이 강화되고 일부 파생금융상품 거래에 대한 규제가 도입되겠지만 경제 전반이 국가 주도의 규제 위주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다. 물론 그것이 앞으로 더 큰 위기를 불러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케인즈주의의 귀환을 마냥 반길 수 있나?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만 교수는 최근 미국의 구제금융과 관련하여 "1990년대 초 스웨덴 정부가 실시했던 방안, 즉 금융시스템을 부분적, 일시적으로 국유화하는 대책은 이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훨씬 좋은 방안"이라고 주장하면서, "부진한 소비지출과 고용을 자극할 경기부양책"을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전형적인 케인즈주의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37, 38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미국의 대공황 극복에 기여한 케인즈를 칭송하며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다"라고 외친 바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닉슨 재임 기간 동안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케인즈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그 케인즈가 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섣불리 시카고학파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종언, 케인즈주의의 귀환을 단정할 수는 없다.

미국발 세계적 금융위기 속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중국식 국가주도 경제발전 모델로 간주된 베이징 컨센서스의 영향력이 다소 세어지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러한 방향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설령 그런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의 확대로 금융위기의 본질 자체를 해소할 수 있는가. 케인즈주의의 귀환이 신자유주의 시대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위기 대응책이 될 수 있는가. 국가 개입이 최소화된 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시장을 만들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국가 대 시장' 프레임을 넘어서야

한때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강조한 밀리반드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 플란차스 사이의 치열한 국가론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한 실체의 두 측면이 각기 달리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굳이 이 밀리반드-플란차스 논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성격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의 최소 공통성은 이러한 국가라는 매개가 없이는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 근저에는 계급적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국면에 따라 국가의 성격, 그 위상이나 역할이 다양하게 표현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경쟁국가도 적극적으로 경제 전반에 개입해왔다. 노동유연화와 공공부문 사유화, 광범위한 규제 완화, 자본시장 육성을 위한 대대적인 지원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핵심적인 역할은 바로 국가가 해 온 것이다. 때로는 권위주의적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고, 수탈적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장과 국가를 허구적으로 대립시켜온 신자유주의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프레임에 갇힌 채 허우적댄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있었다.

동아일보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이란 사람은 9월 25일자 동아일보 칼럼 '멜라민과 신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가 몰락했다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럼 중국식 국가주도 자본주의를 하자는 것이냐며 '멜라민'이 '금융위기'보다 더 위험하다는 황당한 논지를 폈다.

"좌파는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논쟁에 끼어들어서 국가의 역할을 케인즈주의보다 더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좌파 경제학자도 있는데, 국가의 역할 강화로 초점을 맞출 경우 동일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금융적 팽창은 자본의 불가피한 운동과정이다. 설사 금융산업 전반을 국유화한다 하더라도 자본의 속성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적 국가 개입만으로는 노동자와 국민 대중에게 위기의 고통을 떠넘기는 것을 막아낼 수 없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단초는 국가와 시장 사이의 시소게임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서 국가와 시장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지금은 '국가 대 시장' 프레임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한데, 그 핵심은 국가와 시장의 대립을 넘어선 사회적 조절과 민주적 통제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위한 적극적 수단을 찾아내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정치 프로젝트를 어떻게 가동할 수 있느냐다.

위기가 저절로 기회가 되지는 않는다

미국식 금융시장 자본주의가 적어도 표면적으로 위기에 처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가 이를 넘어서려는 진보세력에게 저절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공황이 보다 심화되어 파국으로 치달아 자본주의가 스스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순진한 생각은 또 없다.

만일 지금처럼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할 대안과 세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사태가 그런 방향으로 급격하게 전개된다고 하면, 모두가 고통 받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더 크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자본가들은 늘 그 고통을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 대중에게 전가시켜왔다.

1990년대 이후 보다 가속화된 '금융 세계화'가 국가간, 계층간 소득 불평등을 더 심화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제노동기구(ILO)도 16일 발표한 '금융 세계화 시대의 소득불평등'이란 보고서에서 이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해주었고, "최근의 글로벌 금융·경제위기는 향후 소득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일시적 미봉책으로 금융자본의 위기를 해소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계 시민이 겪어야 할 삶의 위기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피해 대중들을 저항의 흐름으로 연결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할 책무가 진보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 앞에 놓여 있다.

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덧붙이는 글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신자유주의 #케인즈주의 #크루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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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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