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이제까지 한국에서 나온 '일본군 군대위안부'를 다룬 책 가운데 가장 알뜰히 여미어진 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 잘 빚은 책입니다.
소화
아기 손발톱을 자릅니다. 아기는 손톱이 길면 얼굴을 할퀼 수 있기 때문에 조금만 자라도 가위로 잘라 주어야 합니다. 어른들 쓰는 손톱깎이로는 아기 손톱을 깎을 수 없습니다. 여느 때에는 자를 수 없고, 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때, 아니면 엄마젖을 물고 있을 때 자릅니다. 그러나 잘 때에는 발가락이 간지러워서 깨기도 하기에, 웬만하면 젖을 물 때 자릅니다.
아기 손발톱을 자른 뒤, 옆지기 손발톱을 깎습니다. 아기를 낳은 뒤부터 오늘까지 아흔 날 하고도 이틀이 지났으나, 옆지기는 아직 제 몸을 되찾지 못합니다. 식사장애가 있는데다가 산부인과에서 받은 아픔이 모두 가시지 않기도 했지만, 갓난쟁이하고 늘 붙어 있어야 하다 보니, 집 바깥으로 바람 쐬러 나들이를 하기조차 힘들어서 마음이 지치는 바람에 몸이 함께 지칩니다.
이리하여 손발톱을 깎아야 한다고 스스로 말은 하지만, 깎기 힘들어서 아기한테 젖을 물린 채 벽에 기대어 잠듭니다. 지아비는 옆지기 손톱과 발톱을 차근차근 깎습니다. 다 깎은 손발톱을 보는 옆지기는 “되게 바짝 깎네.” 하면서 “나는 이렇게 못 깎는데.” 합니다. “그다지 바짝 깎지도 않았는데.” 하고 대꾸하니, “바짝 깎아도 빨래를 못하니 손톱이 지저분하네.” 하고 이야기합니다.
.. 이 책은 종군위안부와 그 제도의 역사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는 그 실태를 은폐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일본군 성노예’ 또는 ‘군용 성노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전후 약 50년 간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그 본질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 이 책의 커다란 목적의 하나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은 위안소에서 강제, 미성년자의 사역, 징집시의 강제와 그에 대한 일본 국가의 책임이다. 나아가, 위안소 제도라는 군용 성노예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다는 것이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의 논쟁은 단지 위안부 문제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일본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인의 자긍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본인의 역사 인식과 아이덴티티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의 민족주의적인 언설의 배경에는 한일 간 또는 일본인과 다른 아시아인과의 역사 인식의 차이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 (7, 8, 9쪽) 두 여자 손발톱을 자르고 깎은 뒤 제 손발톱을 깎다가 잠깐 멈칫합니다. ‘빨래를 못하니 손톱이 지저분’해진다고?
물끄러미 제 손톱을 들여다보고 발톱을 만져 봅니다. 참말 제 손발톱에는 때가 하나도 없습니다. 남들보다 손을 자주 씻는다고 할 수 없고, 아니 손을 씻는 일도 드문데, 손발톱에는 때가 조금도 없습니다.
옆지기 말을 미루어 보니, 날마다 퍽 긴 시간을 아기 기저귀를 빨고 옆지기와 제 옷을 빠느라 보냅니다. 새벽마다 콩과 쌀과 여러 곡식을 씻어서 불려 놓습니다. 밥하기와 설거지하기를 도맡고 있습니다. 날마다 한 번씩 아기를 씻깁니다. 한두 주에 한 번씩 이불이나 담요를 한 장씩 빨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날마다 하지 못하기는 하나, 걸레를 빨아 방이며 나무벽이며 훔치고 닦습니다. 딱히 손을 씻는 때는 없지만, 참으로 긴 시간을 물을 만지면서 삽니다. 손에서 물기 가실 겨를이 없으니, 어쩌면 이러저러하는 동안 손발톱에도 때가 앉을 겨를이 없는지 모릅니다.
.. 일본이 개시한 전쟁은 대의명분이 없는 침략 전쟁이었고, 또 승리의 전망이 없는 무모한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전쟁에 휴가 제도도 불충분한 채로 장기간 전장에 장병을 묶어 놓기 위해서 성적 위안이 필요하다고 일본군은 생각했던 것이다 … 일본군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육해군 전부가 전시에는 휴가를 주지 않았다. 더구나 병영 내에서 병사의 인권은 완전히 무시된 채 상관의 엄격한 감시와 사적인 제재가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 (65∼66쪽)우리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제 손은 제 국민학교 적 어머니 손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제 국민학생이었을 때 어머니 나이였는데, 어머니는 당신 나이와 견주어 다른 동무네 어머니보다 손이 누렇게 뜨고 마디가 굵고 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습니다.
어머니 손에서 물기 마를 날은 거의 없었고, 잠깐이나마 자리에 앉아 쉬는 때는 거의 못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참 힘들게 살림을 꾸리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어머니가 무엇 하나 심부름을 시켜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속썩이거나 근심하시지 않도록, 또 어머니 부업을 거들 수 있으면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왜 어머니(여자)들은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이웃 어머니들도 그토록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 술동무가 집으로 놀러오면 ‘왜 어머니들만 그렇게 술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머니한테도 술동무가 있어서 서로 놀러다니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녀차별’이나 ‘남녀평등’이라는 이름을 모르던 때이고, ‘성차별’이나 ‘성평등’이라는 낱말은 들어 본 적이 없던 1980년대에, 인천 제2부두 앞 조그마한 집에서 우리 집 돌아가는 흐름과 이웃사람 꾸려가는 삶을 지켜보면서, 내가 남자로 태어나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났어도 그리 좋은 꼴은 못 보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만큼 내가 할 몫이 있다는 뜻이 아니랴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우리 아버지, 또는 이웃 아버지, 또는 학교 남자 교사, 또는 동네 아저씨나 할아버지 …… 둘레에서 보고 부대끼는 숱한 남자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런 멋없고 짜증스럽고 안쓰러운 삶으로 내 앞길을 얼룩지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군인으로부터 성병을 옮겨 받은 것은 위안부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더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성병에 걸려도 대단한 것은 아니라며 콘돔을 사용하지도 않고 습격해 오는 군인들도 적지 않았다 .. (171쪽)또렷하게 언제부터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퍽 어릴 때부터였는데, 조그맣게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앞으로 커서 제금나게 될 때, 그리고 뒷날 누군가와 짝이 맺어져 함께 살게 될 때에는, 모든 집살림을 내가 하겠노라고.
이런 꿈을 꾸면서 어머니가 하는 일을 찬찬히 돌아보게 됩니다. 동무네 집에 놀러가면, 동무네 어머님이 하는 밥과 반찬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처음 보는 밥거리를 보면 어떻게 하는지를 꼭 여쭙니다.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사는지 둘러보고, 우리 집 꾸밈새와 다른 꾸밈새는 더욱 눈여겨봅니다.
버리는 물건이 없도록 살고, 작은 물건 하나도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된다고 느끼고 있어서, 과자봉지 하나도 안 버리고 모아 두는 버릇이 일찍부터 배어 있습니다. 딱히 다시쓰기를 한다고 배우지는 않았는데, 어머니가 다시쓰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이 얼음과자 막대기는 어디에 다시 한 번 쓰고, 요 라면봉지는 어디에 또다시 쓸까 하고 머리를 굴렸습니다. 이것도 안 버리고 저것도 안 버리면서 모읍니다. 종이조각 하나도 책갈피로 쓰면 되고, 종이접기를 해서 갈무리를 해도 됩니다.
한 번 혼인하고 한 번 헤어지고, 다시 한 번 혼인하여 살고 있는 이즈음, 혼자 살 때이든 둘이 살 때이든 집식구 빨래는 거의 제 몫입니다. 하기는, 집식구 밥도 제가 차려 주니까요. 옆지기가 아기를 배었든 배지 않았든, 부모님 집을 나와서 혼자 살던 1995년 4월 5일부터 이제까지, 혼자서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혼자서 집을 치우고 꾸미며, 혼자서 집일을 갈무리하고, 혼자서 밥차리고 쓸고닦고 손빨래하고 살았으니, 서른네 해 삶에서 열네 해 삶이나 집일과 밖일을 함께하는 셈입니다.
.. 일본 정부와 군은 조선ㆍ대만에서의 여성 징집에는 국제법상 아무런 제한이 없다고 하여, 조선과 대만을 위안부 공급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 징집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조선의 인구가 대만보다 몇 배 많고, 나아가 중국이 일관된 주요한 전장이었기 때문에 중국인의 동포인 대만인보다는 조선인이 위안부로 삼기에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 또 1956년 일본은 민간인 억류자의 사적 청구권을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에 1000만 달러를 지불하였다. 그러나 억류자가 약 11만 명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당 91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 (182, 208쪽)집일은 사회에서 거의 아무런 대접을 받지 않습니다. 다른 이 집에서 밥어미로 일한다면 달마다 100만 원은 쳐주기는 할 텐데, 자기 집에서 살림꾼으로 일하면 돈 한푼이 없습니다. 집살림은 따로 돈이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 아니니, 돈으로 값을 칠 수 없으며, 돈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있어요. 보람도 있고요. 그러나 집일을 도맡으면서 밖일을 함께하기란, 이 나라 한국에서는 대단히 힘듭니다. 잠이 모자라고 손이 딸리고 몸이 축납니다.
그래서 새삼스레 깨닫고 알게 되는 일이 많아요. 왜 이 나라 한국에서는 ‘여자 학자’가 드물고 ‘여자 지성인’이 드물며 ‘여자 글쓴이’가 적고 ‘여자 정치꾼’을 찾기 어려우며 ‘여자 사장’을 만나기 힘든지. 왜 ‘남자 무엇무엇’만 넘치는지.
그러나 또 하나 새삼스레 깨우치고 알아차리는 일이 있습니다. 이제는 퍽 많은 여자들이 집밖에서 일거리를 찾으면서 움직이고 있는데, ‘남자가 집일을 몰라서는 안 되지만, 여자 또한 집일을 몰라서는 안 됨’을 말입지요. 집일은 한 사람이 옹글게 바로서고자 할 때에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하는 일이라, 여자한테만 떠넘겨서는 안 될 뿐더러, 남자들이 손사래쳐서도 안 되지만, 집밖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남자든 여자든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왜 옛날부터 스승 된 분들이 제자한테 어떤 재주를 물려준다고 할 때면, ‘세 해는 빨래하고, 세 해는 밥을 하고, 세 해는 걸레질을 하고, 그러면서 부지런히 논밭을 갈게 하면서 아홉 해를 보내야 비로소 조금씩 일을 가르쳐 준다’고 했는지를 느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