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경제 대공황시 은행 파산으로 사람들은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진은 당시 노동자들이 은행앞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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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시초가 된 1929년 10월 24일. 하루 동안의 다우지수 폭락으로 그날 하루 자살자가 11명이나 됐다고 한다. 이 날 뉴욕증시의 폭락과 함께 시작된 대공황은 3년 동안 다우지수를 350에서 41로 90% 가까이 끌어내렸다. 당시 뉴욕에 있는 호텔에 가면 벨보이가 "주무시겠습니까, 아니면 뛰어내리시겠습니까" 물어봤다고 한다.
이렇게 폭락한 주가는 1954년에서야 폭락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25년이나 걸려서 회복이 된 것이다. 이 때 평균수명이 50~60세 정도였으니 대공황 때 주식을 산 사람들의 상당수는 주가가 본전이 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공황이 가장 극심했던 1929년부터 4년간 2만 5000개의 은행 중 1/3이 넘는 9000여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빼서 장롱 속에 숨겨두었다. 은행들은 돈을 구할 수가 없어서 대출을 중단했다. 이른바 '완전한 신용경색 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금융 부분에서의 신용경색은 바로 제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돈이 돌지 않으니 고용효과가 가장 컸던 건설·자동차업계의 가동률이 50% 이하로 떨어졌다. 공황 전에 260여만 명이었던 실업자 수는 1933년에는 1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당시 미국 경제활동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치다.
실업은 소비침체를 부르고 다시 생산-고용의 동반침체로 이어져, 대공황을 더욱 오래 지속시켰다.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 버는 돈은 모두 식료품으로 소비했다. 옷·신발을 살 돈이 없어 바느질이 대유행하고 신발이 헤어질까봐 아이들의 외출을 제한하기도 했다.
실업으로 시간은 많아졌지만 돈이 없으니 사람들은 외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공공장소는 황폐화되고 예전 같으면 돈으로 해결했을 육아·요리·의복 수선 등으로 집안일은 더 많아졌다.
굳이 8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태평양을 건너지 않아도 이런 사례는 또 찾을 수 있다. 일본의 버블 붕괴는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지만 자산가치의 엄청난 하락을 가져왔다는 측면에서 다르지 않다.
80년대 버블이 한참이던 때, 주가지수 최고점은 3만8900포인트대였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주가지수는 7600대에 머물러 있다. 부동산 가격이 회복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 당시 일본에서 3년 동안 자살한 사람들 중 버블붕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죽음만 7만6000여 명이었다.
'미네르바'의 비관적 전망, 틀릴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