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일 밤, 건기연 앞마당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서울에서 그리 가깝지 않은 일산 KINTEX(킨텍스) 옆, 건설기술연구원(이하 건기연) 앞마당엔 겨울바람이 매서웠습니다. 공공연구노조 건기연지부가 18일부터 김이태 박사의 징계 철회를 위한 촛불문화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포함한 연구노조 지부장들 10여 명이 달려갔습니다. 퇴근 무렵 건기연 앞마당에는 30여개의 촛불이 바람에 꺼질 새라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약 반 년 만에 다시 촛불을 들었습니다.
명색이 촛불문화제지 촛불소녀들 같은 재기발랄하고 카랑카랑한 즉흥연설도 없고, 유명한 가수나 신나는 풍물도 없이, 그저 순둥이 같이 연구나 하던 같은 부서 직원들, 같은 조합원들의 안타까움만 있었습니다. 이 징계를 보고 내 직장사람들이 싫어진다고, 이 징계는 막아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 옆동네인 대화동에 사신다는 전업주부 한 분도 너무 안타까워 나왔노라고, 어제도 왔고, 다음 주에도 또 오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 몸도 마음도 동동거리고 있을 때 김이태 박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최근 며칠간 보이지도 않았다던 분이 이 추운 저녁에 얇은 트레이닝복만 입고 장갑도 끼지 않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사진보다 훨씬 핼쓱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서 촛불문화제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김이태 박사님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 30초가 그렇게나 길었습니다.
"갓난아기 때 말고는 제가 울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울먹임을 멈춘 김이태 박사의 말은 그렇게 유창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건기연의 위신을 실추시켰다고 징계를 한다는데,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 것이 위신을 실추시킨 것입니까?... 1~2년은 걸려야 할 4대강 환경영향평가를 저보고 한 달 만에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말이 안 되지만, 대운하는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 환경을 재앙으로 만드는 것이어서 안 된다고 여러 번 말을 했는데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지금 이 정부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는데, 그래도 가만있어야 합니까?... 여러분이 저의 징계를 막겠다고 하시는데,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그것을 '상(賞)'으로 달게 받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는 박수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추운 바람 때문에 번져 있는 눈물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내렸습니다. 늘 보던 동료들인데도, 멀리서 온 손님들인데도, 악수도 한 번 못하고, 김이태 박사님은 눈물을 감추느라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가셨습니다.
2. 김이태 박사 부인이 건넨 도넛, 정말 달았다
가슴 먹먹한 것도 잠시. 우리는 뭘 수고했다고, 근처 감자탕 집으로 저녁 먹으러 갔습니다. 김 박사님은 흔한 인사도 한 마디 못하고서 소주까지 곁들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공공연구노조 사무차장이 무슨 도넛을 한 통 들고 오면서 나누어주셨습니다.
"김이태 박사님 부인께서 우리한테 고맙다고 지금 막 사 주신 거예요!"
밥 먹던 중에 또다시 목울대가 뻑뻑해졌습니다. 군것질을 거의 안하는 저도 도넛을 하나 싸와서 지금, 이 글을 쓰며 달게 먹고 있습니다. 김이태 박사님 못지 않게 힘드실 부인께서 애써 건네신 그 정성을, 그 감동을 먹고 있습니다.
3. 7개월이나 지나 김이태 박사를 징계한다고요?
김이태 박사님.
19일 밤 바로 눈앞에 서 있으면서도 인사도 못 드렸는데, 사실 저는 김 박사님께 큰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입니다. 약간 치기 어린 말이지만, 김 박사님 덕분에 제가 KBS 9시 뉴스에 한 번 등장했으니까요.
지난 봄 박사님께서 대운하 양심선언을 하셨을 무렵 저는 잠시 우리 공공연구노동조합 대표를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업무차 지방에 있다가 박사님 소식을 듣고, 망치로 한 대 맞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또한 국책연구원에 20년 넘게 근무한 연구자인데, 소위 '관변연구소' 연구원이 어떻게 이런 용기 있는 행동을 할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가슴 찔리는 상황이 많았을 텐데도 스스로를 합리화했을 터, 이제는 양심에 거리끼는 연구를 한 기억도 가물거리는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기반성도 잠시.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온 국민이 환호할 때, 우리는 누구보다도 김 박사님의 징계를 걱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김 박사님께서는 바로 우리 공공연구노조 조합원이시니까요. 그래서 저는 박사님이 양심선언을 하고 낚시를 가신 주말을 지나고, 곧바로 당시 건기연 원장 직무대행을 찾아갔습니다. 이 일은 결코 징계사안이 아니라고, 차후에라도 어떤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저도 강조하고 직무대행께서도 분명히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대운하 반대와 김이태 조합원 얌심선언 지지'를 위한 국책연구기관 종사자들의 서명을 받아 지난 6월 9일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그 뜻을 청와대에 전달했지요. 바로 그날 KBS 9시 뉴스에 난생 처음으로 제 얼굴이 비친 것입니다. 마침 그날은 대운하 반대 교수단체에서도 기자회견을 했고,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날 이명박 대통령께서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전히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결정타를 날렸다!"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그때 이후 우리는 대운하를 막아내고 진정한 연구자의 자세를 보여주신 김 박사님께 가슴깊이 감사와 존경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국책연구원들에게 '연구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부가 돈을 댄다고 정권과 정부의 입맛대로 연구결과를 내놓으라고 강요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요. 잘 아실 것이기에 길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지금 정부는 저희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산업연구원(KIET) 같은 경제·인문사회계 국책연구원들을 더욱 더 '정책 시녀'로 만들기 위해 구조개편을 추진하고 있고, 저희는 그동안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7개월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김 박사님을 징계한다니요? 애시당초 이명박 정권에게 '신사다움'을 기대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만, 정말로 '치사빤쓰'입니다. 뒷골목 건달들도 이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김 박사님도 오늘 말씀하셨듯이 '4대강 정비사업'으로 다시 대운하를 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또 압니다. 지난 봄, 대운하를 포기하게 하고, 김 박사님 징계를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내게 했던 '촛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김이태 박사님,
하지만, 박사님이 달게 받으시겠다는 그 '상'은 박사님만 받아야 할 상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연구기관 종사자 모두가 받아야 할 상입니다. 그런 좋은 상을 욕심 많게도 왜 혼자만 받으려 하십니까?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됩니다! 절대로 우리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모쪼록 마음 굳건히 잡수시고, 저희와 또 김박사님을 지지하는 모든 국민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건강도 잘 챙기시고요.
4. 12월 22일 촛불잔치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