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외통신원 강인규 기자. 위스콘신대학교에서 박사과정(언론학)을 마치고 강사로 강단에 서고 있다. 저서로는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미국, 미국문화 읽기> (2008, 인물과 사상) 등이 있다.
강인규
이렇게 쓰고 보니 어폐가 있는 것 같다. '그해 총선을 겨냥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기사'라니. 이른바 언론 본연의 자세라는 '중립'이 아닌 '편파' 찬양으로 오인될 법도 하다. 편파적인 기사가 과연 공정할 수 있을까. 강인규는 '중립을 가장한 편파'라는 대답을 준다.
"어떤 언론도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언론이 하는 일은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야기란 언제나 기술자의 입장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내 기사는 중립적이지 않다. 아주 편파적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사회 소수자의 편을 들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언론은 권력자의 입장을 두둔한다'고 강인규는 덧붙였다. 그렇다면 강인규나 보수언론이나 '도진개진'이니 상호비판을 삼가야 할까. 아니란다. '편파'의 싸움에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조작하거나 논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중립을 가장한 편파'라는 '위험한' 표현을 빌려 강인규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이 특정 권력 집단을 두둔하는 데에 강인규는 반대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과 논리에 근거해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조작과 왜곡 그리고 '물량공세'라는 술수를 쓰는 것을 문제 삼을 뿐이라며. 강인규는 그래서 편파적인 글쓰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단, 정당하게 규칙을 지키면서. 그로 하여금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게 만든 장본이 바로 보수언론이라 한편 고마운 마음도 있다.
인용한 기사를 포함해 지금까지도 강인규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주요한 동기는 언론비평이나, 여기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로 글쓰기의 지평을 넓혀온 것. 정치, 사회는 물론이요 예컨대 발레, 고전음악, 재즈, 회화 등속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기사를 통해 과시했다. 심지어 <발레리나의 눈물을 보다(2005.6.17)>라는 기사에서는 웬만한 작가에 비견될 만한 그림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타 언론의 글쓰기를 비판하는데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좋은 글쓰기의 예를 보여줄 수 없다면 공허한 비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얼마 전에는 한 보수신문으로부터 칼럼 제의까지 받은 걸로 보면 이런 노력이 헛돼 보이지는 않는다. 강인규가 끊임없이 비판해온 '그' 신문들 중 하나가 말이다. '그들'을 향한 날선 비판에도 꿈쩍없던 매체가 그의 문화기사에 반응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 신문에 칼럼을 쓸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하나 더 쓰겠다는 생각으로 정중하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보수언론 비판하던 그에게 날아온 보수언론의 '러브콜'가끔 '<오마이뉴스>만이 희망'이라는, 농담 같은 구호를 외칠 정도로 <오마이뉴스>를 향한 강인규의 애착은 각별하다. 그에 따르면 언론의 역할은 사회와 개인을 매개하는 데 있다. 언론사는 이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전제 아래 여러 권한과 특혜를 일시적으로 허락받은 집단이라는 것. 강인규는 그러나 한국 언론이 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우리 언론 특유의 한계도 있지만 이윤추구의 수단이 된 자본주의 언론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이런 가운데 탄생한 시민저널리즘은 시민이 언론의 중재만 기다리는 수동적인 역할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 특히 신문의 위기가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시민저널리즘은 시민이 망하지 않는 한 망할 수 없는 유일한 언론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마이뉴스>라는 매체는 시민저널리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민의 참여 자체만이 시민저널리즘이다. <오마이뉴스>는 '또 다른 언론사'가 아니라 시민참여를 권하고 돕는 장이 되어야 한다."앞서 나는 다양한 분야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강인규의 기사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고 했다. '깊이 있다', '통찰력이 뛰어나다', '유익하다', '쉽다'는 내용의 독자의견이 뒤따르는 것으로 미뤄보건대 <오마이뉴스> 독자들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다.
쉬운 기사. 읽기 쉬운 기사만큼 쓰기 어려운 기사도 없을 것이다. 낯설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는 기사는 더더욱. 그런데도 독자들은 강인규의 기사가 '쉽다'고 말한다. 기사 한 편을 읽고 '쉽다'거나 '이해가 잘 된다'는 독자의견을 쓰는 것이 자칫 엉뚱해 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쉬운 기사를, 특히 난해한 주제를 다루면서 독자를 쉽게 설득하는 기사를 만나는 일이 흔치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강인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사를 쉽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원칙이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도 쉬운 말로 표현이 가능하며 잘 아는 사람일수록 쉽고 명료하게 글을 쓴다고 믿기 때문이다. 난해하고 현학적인 글쓰기는 필자의 이해부족과 혼란스러운 사고를 전시할 뿐이라는 것.
그래서일까. 강인규의 기사 한 편을 읽는 과정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의문들은 마지막 문장이 끝남과 동시에 말끔히 해소된다. 논리 전개 과정에서 독자들이 제기할 의문을 강인규는 스스로 제기한다. 자신이 주장하는 논리의 반대급부까지 미리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영악하다고 할까.
이것은 그러나 빈약할지도 모르는 논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식의 얄팍한 '상술'과는 거리가 있다. 철저히 독자의 처지에서 쓰는 글이다.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은 독자도 이해 못 한다'. 혹은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 해박한 기사는 그러나 이미 습득된 해박한 지식에서 불쑥 태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