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감옥에 있는 단재선생 수감기록단재선생의 수감 사진과 '조선혁명선언'의 일부가 기록되어있다
조창완
다시 죄수동에 들어가자 단재 신채호 선생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단재 선생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단재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의 일부가 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핵심 역량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군중 속에 들어가..."로 시작된 이 글은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의 부탁으로 1923년 1월에 써준 것이다.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조선독립의서'와 더불어 식민지 시대 2대 명문장인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굴하지 않아야 하는 민족의 사명을 말해준다.
일행은 마지막으로 의료실과 처형장을 봤다. 별관인 의료실은 말이 의료실이지 마루타 실험을 하던 장소였다. 교수형이 처해지던 처형실은 처형자를 나무통 속으로 집어 넣어 그대로 묻는 방식을 볼 수 있어서 일본의 시체에 대한 경시를 볼 수 있다. 단재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이곳에서 옥사하는 데,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와서 가까스로 이곳에서 암장을 피하고 어렵사리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었다.
일행은 뤼순 감옥을 나와 다시 따리엔으로 들어갔다. 일본의 심장부 같았던 따리엔이기에 별다른 독립 유적지가 없어서 러시아시절 조차한 흔적이 남은 '러시아 거리'를 들렀다. 따리엔 등지는 부동항이지만 동북의 차가운 기운이 있기에 옷깃을 여밀 수 밖에 없다. 러시아거리를 둘러보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단재 선생이 고구려사를 쓰기 위해 들렀던 지안(集安)이다.
따리엔에서 지안으로 가는 방식은 단둥(丹東)을 거쳐서 육로로 가는 방식도 있지만 겨울의 혹한을 피하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밤기차를 이용했다. 따리엔역에서 16:21분에 출발하는 N185를 타면 다음날 새벽 6:34분에 지안 인근 대도시 통화(通化)에 닿는다. 밤새 기차는 선양, 푸순 등을 거쳐서 다음날 새벽에 예정대로 통화역에 내렸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 참가자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차가운 공기를 만나야 했다. 그날 통화의 아침 기운은 영하 23도였다. 그나마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올라가서 그렇지 이곳은 예사로 영하 30도 아래로 넘어가는 곳이다.
대부분은 잠을 자면서 지나 잘 모르지만 기차가 지난 푸순(撫順)이나 신빈(新賓), 메이화코우(梅花口) 등은 항일전사들이 해방까지 무장독립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현대식 옷으로 겹겹이 입어도 추운 이곳에서 부실한 옷과 형편없는 무기로 무장투쟁에 참여한 전사들은 노숙을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결국 그렇게 얻은 이 땅의 지금 모습을 생각하니 죄스러움에 산 위에 자란 작은 나무조차 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아울러 다시 나라가 위기가 왔을 때 이 땅에 와서 투쟁에 참여할 민족의 역량이 될까가 저절로 걱정됐다.
단재 선생은 1914년 업무 차 동북에 들렀다가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다. 콧물이 나오자마자 얼 만큼 혹독한 추위였지만 집안을 향하는 두시간 여의 여정은 현지 가이드의 편안한 이야기로 인해 금방 훈훈해졌다. 고국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온 사람들은 이곳에 벼농사를 처음 보급했다. 우리 민족의 벼농사를 보고 한족들도 벼농사를 따라 하지만 밥맛만 보고도 조선족이 지은 것인지 한족이 지은 것인지 알만큼 우리 민족의 농사술을 뛰어나다. 물론 이제 농촌에 남은 조선족 동포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