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만 꾸지 말고 과감히 '일탈'하라!

지난 명절, 나를 일탈로 이끈 '산사 체험' 이야기

등록 2009.01.21 09:04수정 2009.01.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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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다가오니 마지막으로 자유를 누렸던 지난해 명절이 떠오른다. 철이 늦게 든 나의 명절은 설렘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한 조카들은 한결같이 명절을 힘에 겨워했다. 내 엄마는 한 번도 명절을 힘들어하지 않으셨기에. 아니 오히려 즐거워하며 음식도 만들고 나누고 하셨기에, 나는 조카들의 그런 마음이 오히려 낯설었다.


아마도 내 맘대로 즐길 수 있는 자유가 있었기에 그, 아줌마들 맘을 몰라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나이를 먹어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날을 잡고 살던 집을 내놓았더니 하루 만에 집이 덜컥 나가버렸다. 명절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어쩌겠나. 결혼 날도 잡았겠다, 5년이라는 세월동안 친숙해지기도 했겠다, 우리는 살림을 합쳐 같이 살기로 했다.

그런데 명절이 문제였다. 결혼 전이라 우리 집 쪽으로 가야 하는데, 집안의 가장 어른인 오빠가 우리 결혼 결사반대를 외치고 나섰으니 그곳엔 적이 너무 많아 갈 수 없는 상황. 이럴 땐 모두 시댁 쪽으로 가야 한다고 이구동성 나를 부추겼지만, 또 내가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리셨지만. 하지만 난 영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년이면 싫든 좋든 가야 할 시댁, 지금부터 목맬 필요 있나?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동안의 내 삶도 되돌아보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도 고민해보고 철저히 내 시간을 보내자고 결심했다. 자기 집으로 같이 가자며 은근히 조르던 그를 좋은 말로 설득해 놓고 어디를 가야 내 귀중한 시간을 정말 잘 보낼 수 있을지 궁리했다. 직업상 많이 다니는 여행은 제쳐놓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산사체험으로 낙점. 한 번도 가지 않은 지리산 자락의 절 화엄사를 선택해 예약했다.

a 화엄사 대웅전과 동오층 석탑 산사에 머물면서 경내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체험이었다.

화엄사 대웅전과 동오층 석탑 산사에 머물면서 경내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체험이었다. ⓒ 이현숙


그동안 그가 태워주는 자가용에 길들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절까지 가야 하는 행보였다. 연휴가 시작되면 교통이 혼잡해지니까 연휴 전날을 떠나는 날로 잡고 교통편을 예약했고, 내려서 갈아타는 곳과 다시 절까지 가는 교통편도 미리 알아놓았다.

차를 네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도 잊고 내 가슴은 어느새 콩닥콩닥 설렘으로 가득 찼다. 마치 봄을 기다리는 소녀 같았고, 드디어 꿈꾸던 일탈이 이루어진 아줌마 같기도 했다.


여섯 시간이 넘는 길거리 행보. 낯선 동네에서 혼자 점심도 사 먹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기도 하면서 절에 도착. 썰렁하게 큰 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저녁 공양은 쓸쓸했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관문일 뿐, 다음 날부터는 체험 온 다른 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밥 먹을 때와 새벽, 저녁 예불을 드리러 갈 때만이었지만.

a 각황전 우리는 여기서 예불을 했다. 너무 추워서 몸이 다 얼어 붙는 것 같았다.

각황전 우리는 여기서 예불을 했다. 너무 추워서 몸이 다 얼어 붙는 것 같았다. ⓒ 이현숙


a 산사체험 우리가 묵었던 절집 앞에서...

산사체험 우리가 묵었던 절집 앞에서... ⓒ 이현숙


나머지는 오로지 나를 위한 귀중한 시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예불을 들이면서는 우연히 과거로 돌아가게도 되었고 참회하는 마음도 가졌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소회도 정리하고 내 앞날도 빌어 보았다. 낮 시간 햇살이 골고루 퍼지면 혼자 절 경내를 다 돌아보고 계곡을 건너 오솔길을 걸었다.


a 절집 오래된 집에 신식 문을 달아 낯설어 보였던...

절집 오래된 집에 신식 문을 달아 낯설어 보였던... ⓒ 이현숙


신선한 바람이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자유를 즐긴다지만 만만치 않게 곱지 않은 시선들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그 시선들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2박3일,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소중한 인연도 만나고 절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다.

물론 새벽예불시간에는 일어나기 싫었고 법당은 너무 추웠다. 그곳은 국보라서 어떤 난방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다 들렀다 떠나가는 나그네야 뭐 대수겠는가, 매일 그 추운 법당에서 불공드리는 스님들도 계신데.

a 천불전 언제봐도 정겨운 풍경들이었다.

천불전 언제봐도 정겨운 풍경들이었다. ⓒ 이현숙


그러나 공양은 정말 맛있었다. 화엄사는 본래 맛있는 사찰 음식으로 소문난 절집이란다. 특히 방장님(?)은 아주 친절하고 인심이 좋으셨다. 우리에게 언제든 이쪽에 오면 꼭 들러 밥을 먹고 가라며 당부까지 하셨다.

거기다 명절 전날은 절을 방문하는 분들께 대접할 음식을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우리(산사체험을 온 다른 두 명)는 그곳에서도 명절 음식을 접했다. 우리가 한 것은 산적을 꿰는 일. 셋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아주 재밌게 음식을 만들었다. 당연히 다음날 우리도 우리가 만든 그 음식을 먹었다.

a 지리산 계곡 지리산 올라가는 길목의 계곡에서....

지리산 계곡 지리산 올라가는 길목의 계곡에서.... ⓒ 이현숙


돌아오는 길 역시 혼자였다. 예매를 해놓지 않아 멀리 돌아서 왔지만 고생이 된다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난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일탈을 해보라고 부추기고 싶다. 시댁, 남편, 아이들. 많은 걸림돌이 있을 테지만 한 번만이라는 단서를 단다면 그들도 기꺼이 호응해주지 않을까? 그 한번만이 자기 인생에 적절한 쉼표가 돼 준다면 정말 값진 시간일 테니 말이다.
#명절 #산사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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