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돈 힘밖에 없다?

들기름을 짜면서

등록 2009.01.23 09:06수정 2009.01.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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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들깨가 눈에 띌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내일, 내일 하다가 방앗간에 가는 걸 계속 미루던 터였다. 지난 가을 시골형님 댁에서 들깨 한 말을 부탁할 때만 해도 물건이 오면 당장에 기름을 짤 것 같았는데, 먹던 기름이 똑 떨어져서야 몸이 움직였다.


 들깨 한말 3만원 주고 시골에서 사왔어요.
들깨 한말 3만원 주고 시골에서 사왔어요. 한미숙

 잘 여물었어요.
잘 여물었어요.한미숙

동네 재래시장의 단골로 드나드는 방앗간에 가니  70대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먼저 와 계셨다. 내가 들어서니 어서 와서 불을 쬐라고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 그날은 춥고 바람마저 부는 날씨여서 방앗간에 놓인 주홍빛 가스난로가 무척 반가웠다.

“기름 짤 거유? 한 말에 얼마 줬슈? 이거 안 씻어온거네. 그럼 저 통에다 쏟아야 혀. 저기 기계가 알아서 다 씻겨주거든.” 

 방앗간에서 들깨를 세척해줘요.
방앗간에서 들깨를 세척해줘요.한미숙

 들기름 짜고 있어요. 방앗간은 지금 고소한 냄새가 그득해요.
들기름 짜고 있어요. 방앗간은 지금 고소한 냄새가 그득해요.한미숙

 체에 걸러지는 기름.
체에 걸러지는 기름.한미숙

방앗간 아주머니는 들락날락 하며 일을 보는데 할머니들이 마치 주인처럼 내 들깨를 보고 이것저것 묻는다.

두 할머니도 참깨를 갖고 와서 기름을 짜는 중이었다. 한 분은 벌써 기름을 다 내려 병에 담아 놓고 친구할머니 기름을 짜는 동안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구즉동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묵마을로 유명했던 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주민이었다. 묵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마을을 떠나거나 새로 짓는 아파트 분양을 받았을 것이다.

묵마을 얘기는 계속됐다. 그러면서 한 할머니가 ‘늙으면 돈 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잘 알고 지내던 이웃 노친네라는 분이 보상으로 나온 돈을 모두 큰 자식에게 줬단다. 그 후에 사이좋던 5남매가 뿔뿔이 흩어지고, 큰자식에게 의지하고 홀가분하게 살 줄 알았던 노친네는 큰자식에게 대접받기는커녕, 다른 자식들도 자기 어머니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는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확신하듯 말씀하셨다.


“그러게 돈은 자식한테 다 주는 게 아녀. 다 맡기고 나니까 맘이 싹 달라졌지 뭐. 노인네가 그거 도로 달라고 할겨? 주지도 않어. 안 줄 핑계가 을매나 많것어. 젊은 사람들 머리 돌아가는 거 노친네가 어뜨케 따라가? 노친네만 불쌍혀. 그래서 나는 죽을 때, 그때 내놓을 거여. 내 꺼, 내가 갖구 있어야 혀. 그래야 애들도 무시하지 않어.”

올여름에 입주할 묵마을 터에 올라선 고층아파트는 현재 내부공사중이다. 두 할머니는 같은 동네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는데, 거의 보상금으로 얽힌 얘기들이었다. 할머니는 다행히(?) 보상금 때문에 그리 속상해 할 일은 없어 보였다. 


나중에 기름을 짠 할머니가 핸드폰을 눌렀다. 기름을 다 짰으니 차를 갖고 오란다. 잠시 후,  죽을 때까지 ‘돈’은 갖고 있어야 된다고 했던 할머니의 며느리가 왔다. 두 할머니가 나가자 방앗간이 휑하다.

 소줏병으로 여섯병하고  조금 더 나왔어요.
소줏병으로 여섯병하고 조금 더 나왔어요. 한미숙

들깨 한 말 살짝 볶아서 기름으로 짜니 소줏병으로 여섯 병 하고, 조금 더 나왔다. 한 말 짜는 데는 6,000원을 줬다. 병에 담긴 들기름을 보고 있자니 명절 앞두고 일거리 하나를 해치운 것 같다. 들깨가 기름으로 나오기까지 ‘지키고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고 먹는 안전한 맛, 그 맛을 어디에 비하리. 네 병 정도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로도 나눠줄 수 있겠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가진 돈 없어도 구순의 꼬부랑 시엄니를 행복하게 하는데 마음을 쓰는 여러 가족들 생각이 났다. 돈 힘을 크게 믿고 있는 할머니 마음도 헤아려졌다. 특히나 요즘 ‘경제’를 떠받드는 세상에 돈은 거의 신이다. 그래도 칠순을 넘게 살고 계신 할머니가 여직 살면서 ‘돈 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sbs u포터에 송고합니다.
#들기름 #방앗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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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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