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청블로그에서 찾아 본 이석주선생님선생님만은 파릇한 화초잎처럼 세월이 비켜갈 줄 알았는데...
강원도교육청
나는 선생님과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빠른 일곱 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나는 저학년 때부터 신체와 체력이 한 살 위의 친구들을 따라가지 못해 힘을 쓰는 놀이에서 늘 소외되곤 했다. 덩치 큰 친구들이 발로 내찬 축구공이 얼마나 빠르고 무서웠던지 피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잘 보살펴주셨다.
이따금 선생님의 숙직 당번날이면 학교숙직실로 놀러오라고 하셔서 당시 시골에선 흔치 않았던 텔레비전을 보는 재미에 숙직실에 가곤 했었는데 텔레비전을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고는 하였다. 아침에 잠을 깨면 쑥스러운 느낌에 별 인사도 못하고 집으로 내쳐 달려오곤 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의 '자연 가꾸기'는 학교 밑에 있던 밭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결명자를 수확하기 위하여 낫질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시골아이들에게 낫질은 요즘의 컴퓨터게임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낫질이 서툴렀던 나는 그만 낫으로 왼손 검지손가락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손가락에 피가 제법 흐르고 덜렁거리는 느낌까지 들어 속을 살펴보니 뼈가 보일정도였다. 하얀 뼈를 보자 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선생님이 놀라서 달려오셨고 피가 흐르는 손을 내 머리위로 높이 치켜 올리셨다. 그러자 흐르던 피가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다행히 학교 가까운 곳에 보건소가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싸매어 계속 내 머리위로 잡아 올리신 채 보건소까지 함께 가셨다. 가는 동안 나는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때는 그랬다. 손가락의 아픈 통증보다도 선생님을 불편하게 했다는 죄송함이 먼저였고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간다는 그 사실이 그저 수줍을 따름이었다.
보건소에서 몇 바늘을 꿰매는 동안 선생님이 오른 손을 꽉 쥐어 주셨다. 그리고 며칠 뒤 종례시간에 '철원이가 마취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꿰매는데 사내답게 잘 참더라'며 친구들 앞에 나를 으쓱하게 해주실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마취 같은걸 하고 치료를 했나보다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도 아픈 걸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짧은 시간에 마취를 못 한 것이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아마도 옆에 계신 선생님이 마취제 이었나보다.
아직도 왼손에는 세 겹의 선명한 바늘자국이 추억의 일기장처럼 손가락에 새겨져 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반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선생님을 좋아했다.
선생님이 좋으면 공부도 잘 한다고 했다. 6학년 2학기가 되어 교육청에서 치르는 평가시험이 있었다. 아마 요즘의 학업성취도 일제고사쯤 되었나보다. 우리반이 교육청 관내 학교 중에서 월등하게 좋은 점수를 받았나보다. 당시 시험관리를 위해서 학교마다 시험감독 선생님을 서로 바꾸어서 진행을 하였는데 하필이면 우리 반에 배정된 시험감독이 다른 초등학교에 계셨던 나의 아버지였다.
교육청에서 이것을 문제 삼았다. 아들이 있는 반의 감독소홀로 우리 반이 좋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반만 재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 참, 배정을 교육청에서 해놓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처음으로 밤을 꼬박 새어 공부를 해보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재평가 시험은 치르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해 당사자인 나는 자존심도 상하고 선생님에게 누가 될까 하는 심정에 참으로 심기가 축축했던 며칠이었다. 아마 그 때 공부한 것으로 시험을 봤다면 참으로 좋은 점수가 나왔을 것 같다.
그러던 나는 2학기말 무렵에 선생님과 헤어져야 할 일이 생겨버렸다. 누나들이 자취를 하고 있던 원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도록 할 량으로 부모님은 졸업 전에 나를 원주로 전학시키려 하였다. 나는 '그럴 거면 학교를 아예 안가겠다'며 소위 등교거부시위(?)를 하였다. 5학년 때에도 기르던 '메리'(우리집 개이름)를 팔아치울 조짐이 보이자 학교를 안가고 '메리'와 함께 하루 종일 산속으로 피신(?)했다가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내려왔던 전력이 있었다. 부모님은 결국 나의 뜻을 거두어주셨고 나는 선생님과 함께 6학년 3반 졸업앨범에 실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