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시간에 토익시험, 이건 아니잖아!

폐과 막기 위해 전공 시간에 토익 공부 시켜

등록 2009.03.04 14:43수정 2009.03.0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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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3일) 저녁 내가 다니는 00대 인문학과와 관련된 학과에 다니고 있는 후배가 갑자기 자취방에 찾아와서는 대뜸 "오빠! 나 수강신청 잘못한 것 같아"라고 하며 1시간 내내 하소연을 했다.


후배가 수강한 과목 중에 '평화와 OO'라는 강의가 있다. 전공 기본 강의라서 학과 학생이라면 졸업하기 전에 무조건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다. 이름으로 봐서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평화의 문제를 다룰 것만 같다. 하지만 수업에 1시간은 토론식 수업을 진행하고 나머지 2시간은 토익 시험을 친다고 한다.

"시험점수 낮은 사람은 벌금 걷겠습니다!"

'평화와 OO' 시간에 토익 시험 치는 것도 학생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인데 점수가 낮은 사람에게 벌금을 거둔다고 한다. 그리고 거둔 돈으로 학회실에 토익책을 비치하기로 했단다.

당연히 '평화와 OO'에 관해서만 배우는 줄 알고 수강 신청했던 학생들은 늘어난 과제에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학과를 다니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3학년이 되면 다른 공부에 바쁜데 공부할 분량이 늘어 부담스럽다"라고 하소연하였다. 

학과평가제 기준은 '토익 점수'와 '취직률'


2009년도부터 학교 측에서는 학과평가제를 실시하여 미달하는 학과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학과생들의 토익 점수와 취업률을 평가 기준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취업률 같은 경우 각 학과마다 졸업생들의 취업 성향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타과와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교수님들은 타과와 벌이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학과생들의 토익 점수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학과가 폐지된다면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구조조정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학교의 지침에 적극적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a  어쩔 수 없이 토익책을 구입했다는 윤리문화학과 후배

어쩔 수 없이 토익책을 구입했다는 윤리문화학과 후배 ⓒ 배성민


후배는 필자에게 교수님의 심정은 십분 이해되지만 '이건 아니다'라고 누차 반복해서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위에 있는 친구들을 불러 토론을 벌였다.

황XX(윤리문화학과) =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평화와 윤리 시간에 토익 시험을 쳐야 되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학생들이 원한다면 토익 강좌를 개설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학과 같은 경우는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전공과 연계하여 '서양사 영문강독'이라는 수업을 개설하기도 했어. 이 과목 같은 경우는 전공심화 과목으로 두어서 원하는 학생들이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어."

김XX(철학과) = "학교 측이 학과평가제도를 이용해서 실용적인 목적에 맞지 않는 과를 폐지하려는 수작인 것 같아. 난 명백히 순수 학문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해."

이X(교육학과) = "사회 풍토가 점점 실용주의를 더 선호하는 것 같아 인문학이 설 자리가 더 줄어들까 걱정이 돼. 하지만 요즘 토익 공부를 하지 않으면 취직하기 힘든데 나쁠 것까지는 없는 것 같아."

"선배, 그럼 저희 학과는 없어지는 거예요?"

a  기초학문은 없애려하고 실용학문만 살리려고 하는 대학의 풍토를 비판한 만화다.

기초학문은 없애려하고 실용학문만 살리려고 하는 대학의 풍토를 비판한 만화다. ⓒ 최인수 시사만화방


친구들끼리 막 토론을 하고 있는데 올해 철학과에 입학한 후배가 갑자기 "선배, 그럼 철학과 없어지는 거예요?" 라고 물었다.

"철학과 하면 취직이나 실용적인 목적보다 책 읽고, 글쓰고, 토론하고 뭐 이런 거 아니에요? 근데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철학과 올해 없어지지 않을까요? 이제 갓 철학과에 들어왔는데 저는 졸업할 수 있을까요? 선배, 정말 제가 다닐 때 철학과 없어질까봐 두려워요."

필자는 이런 질문을 하는 새내기에게 명확한 답을 줄 수 없었다. 열심히 토익 점수를 올려서 철학과가 학과 평가제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노력하자고 할 수도 없었다. 또 철학 공부를 하러 온 후배에게 다른 과로 옮기라고 할 수도 없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소연을 하러 온 후배가, 필자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오빠, 이런 사실을 기사로 써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학문이 대학사회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 그리고 수업조차 학교의 결정에 순응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 부당하다는 것을 알려줘. 기사에 내 이름 써도 된다.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열심히 알릴 테니 오빠는 기사나 열심히 써주라!"

기사에 후배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배의 뜻이 널리 알려지기를 필자도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와 프로메테우스에도 송고하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와 프로메테우스에도 송고하려고 합니다.
#토익 #취직 #순수학문 #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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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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