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재조사 없이 배당문제 개선책 마련할 것"

사법부 내홍 겪나... 판사들 목소리 갈수록 커져

등록 2009.03.04 18:56수정 2009.03.05 15:11
0
원고료로 응원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김태헌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 김태헌

서울중앙지법의 '촛불재판 몰아주기' 파문이 대법원의 진화로 대외적으로는 일단락된 듯했으나, 내부에서는 판사들의 진상규명 요구가 연일 잇따르고, 여기에다 법원공무원들도 판사들에게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대법원을 압박해 수면 아래에서는 들끓고 있는 양상이다.

 

3일 밤 법원내부게시판에는 한 판사의 의미심장한 글이 올라왔다. 서울남부지법 김영식 판사가 "서울중앙지법 파문을 간단히 넘길 수 없다. 동료법관들마저도 법원행정처의 진상조사를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라는 말을 남긴 것.

 

이는 사실상 서울중앙지법 수뇌부가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 것으로 심각하게 문제 인식을 하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고, 또한 종전 진상규명 요구에 한 발 더 나아가 일선 판사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대법원을 더욱 압박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대법원은 비교적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대법원 오석준 공보관은 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판사들이 잇따라 의견을 표명하는 것에 대해 "판사들이 법원행정처 조사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으면 해소시켜 줘야 하지 않느냐"면서도 "다만, 재조사는 하지 않고, 배당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 공보관은 책임자 문책에 요구에 대해서는 "(몰아주기) 배당은 중요사건에 관한 예규가 있고, 단독판사들에게 일일이 확인해 보니 허만 형사수석부장판사에 대한 (압력) 부분도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단독판사들이 모두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그렇다면 언론이 왜곡보도를 한 것이냐"고 묻자, 그는 "글쎄요"라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기자가 "만약 왜곡보도를 한 것이라면 엄정 대처해야 한다는 판사들의 요구도 나왔다"고 되묻자, 오 공보관은 "대법원에서 일일이 대응한 적이 없어서…"라고 즉답을 피했다.

 

정영진 부장판사 필두로 이정렬, 송승용 판사도 가세

 

판사들의 의견표명은 서울서부지법 정영진 부장판사가 지난 2월 24일 법원 내부게시판에 '한국에서 사법권 독립의 요체는 사법부 내부로부터의 독립입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다음날 '사법권 독립을 흔들려는 세력에 대하여는 사법부 내외를 막론하고 법관들의 단호한 입장표명이 필요합니다'라는 글을 게시하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독판사들을 상대로 서면과 전화통화만으로 단 하루 만에 진상조사를 벌인 대법원이 2월 26일 한마디로 "부적절한 개입은 없어 문제될 게 없다"는 공식입장을 내놓자, 판사들이 항의성 글을 잇따라 올리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 있는 해명을 촉구하고 나선 것.

 

다음날인 2월 27일 서울동부지법 이정렬 판사는 '희망합니다'라는 글에서 "법원행정처장님은 국회에서 '촛불재판과 무관한 원론적인 얘기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로 말씀했는데, 하지만 언론보도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원론적인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법원이 받고 있는 의혹을 말끔히 없애고 진정으로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법원이 되기 위해서는 보도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를 밝혀, 만약 언론이 사실을 왜곡해서 보도한 것이라면 그 언론기관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판사는 특히 "만약 보도가 사실이라면,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를 추락시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경주해 온 국민의 신뢰회복을 위한 법원의 노력을 순식간에 수포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를 한 것인 만큼 누구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 원인을 꼭 밝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일에는 울산지법 민사2단독 송승용 판사도 '사법부를 흔드는 두 가지 손'이라는 글에서 "단독판사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과연 의혹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한다면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것인지, 법원장의 지시가 있었던 것인지 등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 있는 해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선배들이 행한 부끄러운 일들을 현재의 우리가 미련하게 답습하고, 나아가 미래의 우리 후배들에게 유산처럼 남겨 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대법원을 압박했다.

 

송 판사는 "이와 같은 사태의 원인은 바로 법관의 계층적인 서열구조와 승진제도, 그리고 이로 인해 비롯된 법관의 관료화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동등한 동료법관에 불과하다면 단지 선배 법관의 조언에 불과한 것이지만,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법관에 대해 평가하거나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압력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만약 형사수석부장판사가 사건의 배당 또는 즉결심판청구사건에 대한 선고 결과 등에 관해 영향을 미치려고 한 것에 대해 단독판사들이 공동의 목소리를 낸 것이라면 이는 사법부 내부에서의 법관의 독립에 대한 침해에 맞서는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김영식 판사 "실추된 법관 명예회복 위해 진상 밝혀져야"

 

판사들의 대법원을 향한 진상규명 촉구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서울남부지법 김영식 판사는 3일 올린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사법의 독립'이라는 글에서 "손상된 사법에 대한 신뢰와 실추된 법관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진상이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판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법개혁이 최소한 법관사회에서는 오히려 법관의 관료화를 부추겼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며 "각종 통계와 근무평정, 절차의 개선이라는 명분아래 법관들이 동원화되고, 사법행정작용에 예속화돼 왔고, 이러한 사법관료화가 바로 오늘날 사법행정작용이 개개 재판에 간여할 수 있게 만든 근거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러나, 사법의 독립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서 민주주의나 인권만큼이나 중요한 가치이고, 의심할 수 없는 공리(公理-진리나 도리)로 법관의 독립이 사법권의 독립에 본질로서 자리 잡고 있다"며 "그것이 바로 이번 서울중앙지법 파문을 간단히 넘길 수 없는 사유"라고 진단했다.

 

그는 "법관을 법관이게 하는 것은 독립해 심판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가치가 훼손됐다면 그것은 법관사회 전체를 불신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라며 "세간에 논쟁이 되는 (촛불)재판들도 법관이 독립해 심판했다면, 그 결과에 대한 수긍여부는 차치하더라도, 효력이 문제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그러나 법관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재판을 했다면, 그것은 아무리 사소한 재판이라 하더라도, 재판 자체가 무효"라고 강조했다.

 

김 판사는 "법원행정처장님이나 차장님은 누구보다 법원을 사랑하실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 사건으로 법원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이 법원의 발전, 나아가 사법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애정의 근저에 '법관의 독립'을 '법원의 독립'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 헌법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법관의 독립이라는 표제아래,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반면,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헌법에는 '법관의 독립' 대신 '재판소의 독립'을 규정하고 있다"며 "한번쯤 왜 재판소나 법원의 독립이 민주주의에 반하는지, 왜 그것만으로는 사법의 독립이 지켜질 수 없는지를 곱씹어 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김 판사는 사적인 모임에서의 후일담을 털어놓으며 '혼란스럽다'는 말로 우회적으로 대법원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얼마 전 사적인 모임에서 법관들도 개개 재판에 관해 법원장이나 대법원의 지시를 받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그럴 리 없다. 법관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면서 단호하게 부정했다"며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해 저 자신도 혼란스럽다"고 말한 것.

 

그러면서 "동료법관들마저도 법원행정처의 조사를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고 일선 판사들의 분위를 전하며 "유야무야 시간이 흐르기 보다는 이 사건이 명백히 밝혀져서 손상된 사법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실추된 법관들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랄뿐"이라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대법원에 촉구했다.

 

법원공무원들 김 판사에 찬사 보내며 대법원에 쓴소리

 

김영식 판사의 글이 게시되자 법원공무원들은 "용기 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낸다"는 댓글을 봇물처럼 쏟아내며, 각자 나름의 진상규명 촉구를 위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육OO씨는 "도둑떼가 현관에 10톤 트럭을 세워두고 내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는데, 스스로 때려잡지 못한다면 '도둑이야'라고 소리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명예가 전부인 사람들이 그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 받는 일이 생겼는데, 자기 물건 훔쳐가도 '허허' 하며 뒷짐만 지고 있는 사람 같다"며 "김 판사님의 진정한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김OO씨는 "법관의 관료화가 잘 정착되면, 옆집처럼 '판사동일체', '상명하복'이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검찰에 빚대 비꼬며, "예규를 보면 '중요사건'이라고 규정하는 사건들의 경우 기소(또는 소제기)사건의 접수는 물론이고, 영장도 접수단계부터 법원행정처에 보고하도록 돼 있는데, 법관이 자신이 재판할 또는 하고 있는 사건이 접수단계부터 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에게 보고되고 있다면 신경이 쓰이지 않겠느냐"고 따졌다.

 

문OO씨는 "요즘 법원장이 법관들에게 재판상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과 더불어 우려할 만한 것은 각급 법원장들이 실적위주의 사법행정에 집착한다는 사실과 각종 제도를 도입해 법관들을 그 제도에 예속시키려 하는 것"이라며 김 판사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는 "국민에 다가가는 사법부란 기치 아래 시행되는 여러 행사와 각종 통계 시스템에 의해 모든 법관의 실적을 평가 관리하는 시스템은 법관들로 하여금 실체적인 진실보다 실적위주의 재판을 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모든 것은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국민들에게 질 좋은 사법서비스를 제공하려하는 노력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각급 법원장들은 염두에 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OO씨는 "혹 시간이 지나서 그냥 잊혀 지기를 바라는 분들이 있다면 호미로 막을 일을 포클레인을 동원해도 힘들 수 있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며 "김 판사의 말처럼 사건이 명백히 밝혀지기를 소망하며, 전국에 있는 판사들의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판사들이 목소리를 낼 것을 당부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문 위의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문 위의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문 위의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강OO씨는 "판사의 재판권을 침해하고 헌법적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에 대하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고, 이번 사태에서 압력에 직접 관여한 당사자와 그 지시선상에 있었던 이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그들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또한 사법권 독립을 자의적으로 농락하게 하는 지금의 법원 내 제도와 시스템은 반드시 개혁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OO씨는 "관료화의 철의 장막을 법원조직에게서 걷어내야 한다. 강력한 사법행정작용이 이미 전방위적으로 시행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며 "더 이상 방치해서는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사태를 초래할까 염려된다"고 우려했다.

 

최OO씨는 "이번 일은 법관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 중대한 일임에도 법원행정처의 수뇌부는 유야무야 모든 것을 마무리하려고 하고 있다"며 "'중국 베이징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뉴욕에 폭풍을 불러 온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판사님의 용기 있는 의견이 하나 둘 씩 표출될 때 사법부 독립이라는 대의명제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사들의 의견 개진을 당부했다.

 

박OO씨는 "요즈음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를 않습니다. 법관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정말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판사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판사님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냅니다"고 지지를 나타냈다.

 

남OO씨는 "대한민국 대법원 청사에 놓여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다른 여러 나라들의 예와 달리 의자에 앉아 있으며, 눈가리개 없이 두 눈을 번쩍 뜨고 있다"며 "법과 정의를 새겨야 할 때"라고 일침을 가했다.

 

김O씨는 "정치적 고려에 의한 사건의 임의배당은 대한민국 법원에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한 무지막지한 행위로, 서울중앙지법의 사건 임의배당 조정이 사실이라면 사법부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라며 "관련자들은 과오를 국민 앞에 사죄하고 응당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을 섬기는 법원으로 거듭날 것이며, 그래야 인권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로써 법원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책임을 촉구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2009.03.04 18:56ⓒ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촛불재판 #로이슈 #배당 #서울중앙지법 #대법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4. 4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5. 5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