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 꽃 하나 없는 손자의 쓸쓸한 졸업식

[세계 여성의 날] 희귀병 3남매 둔 '여성가장'과 팍팍한 여든 살 할머니

등록 2009.03.07 13:13수정 2009.03.0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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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일은 제101주년 '세계 여성의 날.' 세계 여성의 날은 1910년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이 제창해 처음 정해졌다. 이후 유엔도 1975년에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선포했다. 이 날이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된 것은 1857년과 1908년의 3월 8일에 여성노동자들이 근로여성의 노동조건 개선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에서 연원한다. 그로부터 1백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여성들 삶은 어떨까. 대한민국 두 명의 여성가장을 통해 현 주소를 들여다봤다... 기자주

#장면1. 가족 생계 떠안은 어느 '여성 가장'

 아들과 함께 병원문을 나서는 여성가장 김미선(가명)씨의 뒷모습.
아들과 함께 병원문을 나서는 여성가장 김미선(가명)씨의 뒷모습. 윤평호

지난 4일 오후 천안시 도심의 한 아동상담센터. 막내인 호영(가명·11)군이 상담치료를 받는 동안 어머니 김미선(가명·36·천안시 목천읍)씨는 30분째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아들과 함께 상담센터를 방문하는 미선씨는 다섯 가족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여성가장.

남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씨의 남편(39)은 냉동식품 납품, 자동차 경보기 영업 등 몇 년간 업종을 바꾸며 소규모 자영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사업은 매번 실패했다. 작년 봄부터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건축용역일에 나섰다. 술이라면 입에 대지도 않던 남편이었지만 고된 건축일에 종사하며 동료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건축경기가 어려워지자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건축용역일은 뚝 끊겼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에게 뇌수종이 발병했다. 병으로 남편의 바깥 생활이 어려워지며 가족의 생계는 빈혈을 앓고 있는 미선씨 몫이 됐다.

"결혼 전 근무한 직장경력을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나요? 우연히 노동부에서 개설한 전산세무회계과정을 알게 되어 이수한 뒤 취업을 준비했죠. 성사까지는 1년이 걸렸습니다."

김미선씨는 현재 직장일에만 전력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김씨의 자녀 셋은 지난해 완치가 어려운 희귀병인 소아 류마티스 판정을 받았다.


여성가장, 자녀 교육문제 가장 큰 걱정

둘째딸 미진(가명·13)양은 5년전 소아 류마티스가 발병했다. 무릎과 발목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딸을 데리고 찾아간 종합병원에서 소아 류마티스라는 걸 알게 됐다. 한동안 다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통증 때문에 제대로 펴거나 걷지도 못하던 미진양은 항생제 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됐다.


다행이라 안심했지만 작년 봄 재발했다. 재발 뒤 한달여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을 앞두고 있을 무렵 미진양의 언니인 유진(가명·14)이와 막내인 호영이에게서 소아 류마티스가 발병했다. 지난해 4월 자녀 셋 모두가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미선씨네 가족은 아이들의 희귀병 판정 뒤 의료보호 1종에 책정됐다. 병원비나 약값 부담은 덜었지만 문제는 생활비.

천안시 성남면에 소재한 소규모 도자기 제조공장에서 경리업무를 맡고 있는 미선씨의 한달 월급은 100만원 남짓. 회사 사정이 힘들어지며 월급은 6개월째 정상적으로 지급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생계보조금으로 월 18만원이 지원되지만 방 2개 16평 임대아파트에서 거주하는 다섯 가족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 그러나 김씨의 걱정은 아이들에게 더 쏠려 있다.

"먹고 사는 것이야 이웃분들도 도와주시고 어떻게든 살겠죠. 아이들 교육이 가장 큰 걱정이에요. 학원 하나 보낼 수 없고, 병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왕따라도 되지 않을까 늘 근심이죠."

실제로 호영이는 얼마 전부터 틱 증세가 심해졌다. 미선씨는 일주일에 한 번 회사에 조퇴를 하고 아들과 함께 상담기관을 방문한다. 호영이와 동행해 병원문을 나서는 미선씨. 여성가장의 뒤로 어둠이 깊었다.

작년 12월말 기준해 이혼이나 배우자의 근로능력 상실 등으로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천안지역 저소득 모자가정은 1058세대. 2007년 969세대 보다 증가했다.

#장면2. 여든살 할머니가 토로하는 여성가장의 고달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저녁 준비를 하는 김수인(가명) 할머니의 모습.
노구의 몸을 이끌고 저녁 준비를 하는 김수인(가명) 할머니의 모습. 윤평호

여성 가장의 고달픈 일상은 올해 80세가 된 할머니의 삶에도 투영되어 있다.

김수인(가명·80·천안시 쌍용동) 할머니는 십여 년째 손자(17)와 손녀(15)를 돌보고 있다. 할머니가 손자와 손녀를 돌보게 된 사연은 경제여건과 무관하지 않다. IMF 경제한파가 몰아친 지난 1998년. 천안의 전기설비 제조회사에 다니던 할머니의 아들은 회사가 정리해고를 계획하자 노조에 가입해 활동했다.

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할머니의 아들은 강제퇴직당했다. 가뜩이나 좁아진 취업문에 노조 활동 경력이 결격사유로 작용했다. 재취업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

생계를 위해 아들은 날품에 나섰다. 일거리가 없어 노는 날이 더 많았다. 그즈음 며느리가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화장품 회사에 취업한 며느리는 점차 퇴근 시간이 늦어졌고 아들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몇 달 뒤 며느리는 아들과 크게 싸운 뒤 친정으로 돌아갔다.

아들은 아내를 찾아오겠다며 처의 직장과 처가를 오갔다. 이혼을 결심한 며느리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 안가 아들 내외는 이혼을 했다. 며느리는 곧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이혼 뒤 아들은 두문불출했다. 어느 날 집을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벌써 십 년이 넘었네. 아들마저 집을 나간 뒤 손자와 손녀를 돌보게 됐어. 남편도 없는 처지에 손자와 손녀까지 맡게 됐으니, 졸지에 내가 여성가장이 됐지. 아파트 관리비도 못내 쫓겨나고 교회에서 거처를 마련해줬어. 한겨울이었는데, 구멍 뚫린 천장을 비닐로 가려놓아 하늘이 보이고 보일러와 수도도 먹통이었어. 전기장판 하나에 이불을 세 겹으로 덥고 아이들과 버텼지."

축하꽃 하나 없는 손자의 졸업식

이듬해 봄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접한 천안시의 배려로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기회가 주어졌다. 문제는 250만원의 임대보증금. 틈틈이 다른 집의 밭일을 거들며 할머니가 저축한 돈에 이웃들이 얼마를 보태 겨우 보증금을 마련해 입주했다. 방 2개, 16평의 작은 집. 더 이상 밤 하늘을 보며 잠을 자지 않아도 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집을 나간 아들은 주민등록까지 말소됐지만 이후에도 소식은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과 새 출발한 며느리도 발길을 끊기는 마찬가지. 손자와 손녀는 그래도 할머니의 품 속에서 큰 탈 없이 성장, 손자는 올해 고등학생이 됐다. 손녀는 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에게는 세 식구 생계비로 한달에 30만원 가량이 정부에서 지원된다. 전기세와 가스비, 관리비 등 8만~10만원의 고정 지출을 제하면 가용한 한달 생활비는 20만원 남짓. 빠듯한 생활 속 여든의 할머니는 며칠 전 손자의 졸업식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일찍 돈을 벌겠다고 학교도 공업고로 진학한 착한 손자야. 졸업식에 갈 사람이 나밖에 없었지. 꽃을 살까 한참을 망설였어. 우리에게는 사치지. 은행 잔고가 없어서 졸업식날 앨범값으로 4만원을 주고 졸업장과 앨범을 찾아왔어. 꽃도 없는데, 사진을 찍기도 뭣하더라고. 손자도 그냥 집에 가자고 하대."

할머니의 요즘 걱정은 가난의 대물림. 돈이 없어서 사교육은 생각도 못하고 자란 손자와 손녀가, 공부에서 남들에게 뒤처져 훗날 사회에서 밀려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난 5일 오후 댁에서 만난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가 사회에 잘 정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유일한 꿈"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는 여든의 할머니는 인터뷰 말미에 손녀의 귀가 시간이 다 됐다며 저녁 준비를 위해 싱크대 앞에 섰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천안지역 주간신문인 천안신문 517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윤평호 기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cnsisa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천안지역 주간신문인 천안신문 517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윤평호 기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cnsisa
#여성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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