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말이 요즘 자꾸만 뇌리를 떠돈다. 장자연이란 신인 탤런트에 대해선 사실 별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로 인해 우리나라 연예계의 공공연한 비밀인 성상납이 드러나 충격을 던져주고 있기에 영정 속 사진으로나마 대하게 되는 그녀의 얼굴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늘 TV에서 친근하게 대하던 누이같고, 여동생 같고 때로는 심지어 여자친구처럼 느껴지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여자 연예인들이 연예가 어두운 일면 한구석에서 그간 남몰래 흘렸을 눈물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내 영혼이 다 아플 지경이다.
이즈음 한 유력일간지에 조금 해괴한 시론이 실려 눈길을 끈다. KBS PD를 역임한 바 있고, '독도는 우리땅',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같은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는 박문영씨가 기고한 글이다.
장자연씨를 두 번 죽이지 말라는 제목을 붙인 이 글은 우선 고 장자연씨 자살과 관련 대중의 호기심을 이용 인기영합적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고 장자연씨의 자살은 하마터면 이전에 있었던 모모 젊은 연예인의 자살처럼 그저 우울증에 시달리던 한 철없는 젊은 여자 연예인의 자살로 금세 세인들의 기억속에 잊혀질 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장자연씨의 전 매니저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공공의 적'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한 방송사가 공개한 장자연씨 문건에는 이른바 ' 성상납'을 강요당했고 그로인해 고통받았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어 사건이 확산일로에 이르렀다.
연예계 성상납은 그간 우리사회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공개된 것이나 다름없는 그야말로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이 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장황한 부연설명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작금의 장자연씨 수사와 인터넷상의 논란 등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장자연씨 문건에 관해선 거기에 실려있는 무슨무슨 리스트라며 사회 저명인사들의 실명이 계속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헌데 하필이면 그 리스트에 한 유력일간지 관계자가 포함되어있다는 설까지 나도는 실정에서 마치 제발저린 도둑이 펄쩍 뛰듯 한 객원급 인사의 손을 빌어 바로 그 거론되는 신문사가 이런 글을 싣는다는 것은 모양새 자체가 어이없고 우습지 않은가.
물론 이런 사건에는 으레 근거없는 낭설이 떠돌기 마련이고 그러한 가운데 자칫 무고한 인사가 누명을 쓰거나 피해를 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카더라 방송이 난무하는 가운데 당연히 그런 무고한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되며, 또한 장자연씨 사건과 관련 사건의 본질과는 관련없는 정치적 공방이 오가서도 안 된다.
허나 박씨의 글은 아무리 봐도 사건의 본질과 논점을 흐리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장자연씨 죽음의 책임이 각박한 세상을 만든 우리 모두에게 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장자연씨가 어디 지난해 자살한 모 탤런트처럼 인터넷 악플이나 증권가 사설 정보지 혹은 사채 빚에 시달려 자살했던가? 그런게 아닌 사건의 본질이 따로 있고 그로인한 수사가 본격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 이 무슨 황당한 궤변인가.
그러고나서 글의 논리를 우리나라 방송가의 구조적 문제점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 물론 원론적으로는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던가 우리나라 지상파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장자연씨가 지금 막장 드라마 때문에 자살한 건가?
이어 박씨의 글은 좀 뜬금없이 일본의 경우를 예로들며 고사(枯死) 직전인 우리나라 대중예술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 문맥상 여기서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대중예술은 결국 트로트를 말하는 것 같다 - 헌데 필자가 알기론 박문영씨도 작곡을 하시던 분이라 들었는데, 내가 알고 있기론 박문영씨가 지은 곡 중에도 트로트는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
더욱이 트로트라면 요즘은 오히려 장윤정, 박현빈, LPG 같은 신세대 트로트 가수들이 부른 밝고 경쾌한 노래가 근 몇 년 전부터 계속 뜨고 있는 상황이니 박문영씨가 굳이 그런 걱정까진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 얼마전에도 소녀시대 막내멤버인 서현양도 주현미씨와 함께 듀엣으로 ' 짜라자짜'란 트로트를 발표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결론 부분에 가서 '리스트에 거론된 사람 중 한 명이라도 그녀를 도와주었다면 한국 풍토상 그녀는 벌써 대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장자연씨 정도 되는 신인이 뜨려면 그런 유력인사가 뒤를 봐줬어야 한다는 이야기인건지, 아니면 장자연씨가 뜨지 못한게 지금까지 그런 유력인사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못 떴다는 이야긴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면 혹 한국의 톱스타급 여자 연예인들은 모두 그런 사회 실력자들이 뒤를 봐주기 때문에 잘나가는 것이란 이야긴지, 아니면 한국의 톱스타들은 모두 그런 사회 저명인사들이 밤낮으로 데리고 노는 유희의 대상이란 것인지.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정말 연작(燕雀)의 머리로는 촌탁(忖度)하지 못 하겠다.
내가 듣기로 박문영씨는 98년 당시 방송사 일을 그만둔 뒤 10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다 2007년 말경 귀국한 사람인 걸로 알고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방송풍토도 많이 바뀌었다. 한류도 있었고, 케이블 방송이야 그 이전부터 이미 보급되기 시작했던 것이고 인터넷 또한 한국 방송, 연예계의 문화와 풍토를 바꾸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 그것이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간에.
하지만 미국에서 10년간 공사다망(公私多忙)한 시간을 보내느라 한국 사정엔, 특히 지난 10년 한국의 방송, 예술문화가 어찌 바뀌었는지 그간의 사정을 잘 모를 박문영씨가 이제와 새삼 한국 방송가의 풍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언급하는 것은 좀 우습지 않은가? 박씨가 본문에서 언급한 그 문제많았던 간부의 사례도 어쨌든 한 20년쯤 전의 일이었을 것 아닌가. 70~80년대 한국 방송계를 기억하고 계신 분이 지금의 한국 방송계가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나서 박문영씨의 글을 다시 살펴보니 어떤 서글픔마저 느껴진다. 제 식구 감싸주기인지, 아니면 같은편 옹호하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우리사회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연예계 뒷 이야기를 혼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있으니 어찌 슬퍼보이지 않겠는가.
장자연씨의 죽음이 사회를 각박하게 만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무엇이 그럼 우리사회를 각박하게 만들고 불신풍조가 만연하게 만들었는가? '하늘에 맹세코 한푼의 뇌물도 받은적 없다'고 말하는 정치인이야 말로 그게 가장 큰 거짓말이란 것 우리 국민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연예계의 공공연한 비리와 비행도 그렇게 같은편 감싸기 제식구 옹호하기를 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그네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불신과 냉소도 더더욱 깊어져 가는 것이다.
연예계의 뒷모습이 이러할진대, 설사 그 어떤 젊은 여자연예인이 진실된 마음으로 어느 불쌍한 불치병 환자나 장애우를 품에 안고 눈물흘린다 할지라도 누가 그 눈물이 진실된 눈물이라 믿을 것인가.
박문영씨한테 한 번 묻고 싶다. 박문영씨는 지금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 대한민국 연예계엔 지금까지 단 한건의 성상납도 벌어진 사실이 없다'고 자신있게 큰소리로 외칠수 있는가 ? - 만약 그럴 자신이 있다고 한다면 필자야 할말없게 되는 것이지만.
박문영씨가 진정 한국 대중예술의 발전과 그리고 방송, 연예계의 잘못된 관행과 부조리를 바로 잡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궤변을 늘어놓아선 안 된다. 연예계의 성상납도 분명 우리사회의 잘못되고 뿌리깊은 병폐중 하나며 특히 연예계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여자 연예인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이 점은 분명 개선되어야 한다. 요즘은 웬만한 직장도 다 성폭력 피해 상담실이 있는데, 하물며 만인이 선호하고 우러러 보는 공간인 연예계에선 부도덕한 구시대적 발상인 성상납이 여전히 비일비재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노예계약 등 대형기획사들의 횡포, 매니지먼트 사업의 투명화와 현대화 등 우리나라 연예계의 잘못된 관행과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지혜를 맞대야 할곳은 지금 너무나 많다. 박문영씨는 1977년 TBC 라디오에 입사한 이후, 각 방송사 PD를 역임하며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프로를 연출하기도 했고, '독도는 우리땅',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도요새의 비밀', '힘내라 힘' 같은 노래를 작곡한 유명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일수록 우리나라 방송가의 잘못된 관행과 부조리를 바로 잡기위한 지혜와 대안을 내놓아야지 같은편 감싸기용에 불과한 이런 궤변을 늘어놓아서야 되겠는가.
박문영씨 글 결론부분에 '지엽적인 증상에 매달리다 보면 전신의 병을 오진할 수 있다'는 부분이 눈에 뜨인다. 그렇다! 사실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바로 그렇기 때문이라도 이참에 어쩌다 연예계에 성상납같은 부도덕한 문화가 생겨났으며 또 그런 속에서 힘약한 여자 연예인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도 마땅히 공론화 시켜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제2의 장자연 같은 젋고 불쌍한 여자 연예인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형 기획사 오디션장엔 내일의 스타를 꿈꾸는 수많은 10대 청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 프로필을 찾아보니 작곡가겸 PD 박문영씨는 1954년생이다. 그러니 그의 나이도 어느덧 50대 중반을 지나 후반을 향해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내일의 스타를 꿈꾸는 10대 청소년들은 박씨에게도 막내딸 뻘쯤 될 터. 아니 어쩌면 옛날 같으면 그만한 손녀가 있었을 수도 있는 그런 나이 차이 아닌가.
박문영씨가 진정 한때 '독도는 우리땅'이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같은 노래를 지은 애국 작곡가라면, 정말 한국 대중예술의 발전을 위해선 어떤 잘못된 관행과 부조리를 바로잡아야 하며, 어떻게 하면 힘없는 젊은 신인 연예인이나 지망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지 그런 점을 고민해주기 바란다.
2009.03.21 13:02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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