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독재자가 어떻게 모든 곳에서 민중을 착취하고 그들의 자유를 약탈하는가를 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 폭군에 의해 스스로 학대받는 자는 바로 민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민중은 스스로 노예가 되며, 자신의 목을 자르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자유나 노예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를 포기하고 압제에 굴복하여 노예 처지에 찬성한다. 정말 그들은 노예가 되려고 급히 달려간다 …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열망'하기만 하였으며 단순히 그러한 의지로 만족할 뿐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마땅히 자유를 쟁취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 땅의 민중들이 자유가 없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이라도 알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우연히 얻으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자유의 행복감이란 엄청난 피를 흘려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유에의 열망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 어떤 나라의 경우, 그 나라 사람들은 자유에의 행복감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말 게 아닌가? 자유란 말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그것을 상실할 경우 명예를 중시하는 어떤 사람도 생명을 오래 연장하려 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를 위하여 목숨마저 바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게 아닐까? .. (18∼20쪽)
어디서 자주 듣던 말, 아니 어느 누구나 흔히 하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흔히 말하면서도 몸으로는 옮기지 못하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자유와 평화와 민주를 억누르는 독재와 총칼과 돈다발이 있을 때,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든가요. 우리는 자유와 독재 사이에서, 아니 자유와 돈다발 사이에서 어느 길로 걸어왔든가요. '경제'라는 허울을 걸친 독재에 매인 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옥죄고 우리 이웃들 삶마저 옭죄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분단시대의 성찬과 평화》(일과놀이,1990)라는 얇은 책을 집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얇거나 작은 책에만 눈길이 팍팍 꽂힙니다.
.. 우선 여러분들이 하루 매일 세 끼 식사를 하고 계시고(요즘 유행병처럼 아침굶기가 많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하루 세 끼로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특히 밥을 먹으면서 농민들의 삶이 어떤가, 또 농민들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을 줄 압니다 .. (장경암/13쪽)
1990년을 넘어 2000년, 그리고 2010년, 또 앞으로 2020년까지도 우리 나라는 '분단'인 나라, '남북이 갈라진' 나라로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1990년뿐 아니라 2010년과 2020년에도 "분단시대의 성찬과 평화"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북이 갈라져 있음에도 남북이 갈라진 줄 느끼지 않는다면, 남북이 갈라지면서 배속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음을 깨닫지 않는다면, 우리 앞날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 앞날까지 아니라 우리 오늘날이 어찌 될까요.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 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를 돌아보지 못하면 어찌 될까요. 자가용을 몰면서 이 자가용 하나가 우리 둘레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피지 못하면 어찌 될까요.
.. 우리 나라 학부모들의 70%가 노동자입니다. 그들의 자녀에게 노동자 멸시 교육, 노동 천시 교육을 실시하고 현실에 눈이 멀게 교육을 한다면 어떻게 자녀들이 노동자 부모를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 (한민호/25쪽)
일하는 보람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보람은 일벌레가 되는 보람이 아닙니다. 땀이 선사하는 보람입니다. 땀에 배인 보람입니다. 즐거운 땀이어야 하고, 우리한테 넉넉히 대가로 돌아오는 땀이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한테나 우리 아이들한테나 사람다이 살아갈 길을 가르치는 학교로 가꾸지 못하는데, 남북이 갈라지건 골골샅샅 떨꺼둥이가 외로워하건, 푸대접과 따돌림이 판을 치건, 잘못되고 뒤틀린 말과 글이 판치면서 영어 미친바람만 거세게 불건, 아랑곳하지 못하는 몸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4) 어쩐지 새책으로 사기 힘들던 책
《샤를리 보와쟝/전채린 옮김-기계들의 밤》(형성사,1981)을 만납니다. 오, 드디어 만나는군. 언젠가는 만날 줄 알았지. 아무렴, 다리품을 팔고 또 팔아 못 만날 책이 어디 있으랴고.
.. "초과근무가 없다니, 우린 이제 어떻게 되지?" "투쟁해야지!" "뭘하란 말이니? 동맹파업? 더 많은 돈을 잃어버리려고?" "도대체 우린 어떻게 될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이 깨져 버렸고, 공장에서의 일상적인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따르릉, 감독이 직공 두 명에게 이동대들을 페인트칠하라고 시켰다. 전에는 없던 작업이 휴업에 빠져 있다는 고통을 배가시켜 주었다. "이 정도로 운영이 안 된단 말인가? …… 이러다가 공장문이나 닫는 말이면?" 내가 약간 정치적인 책동을 했다. "이건 다 감언이설일 뿐이야. 지난 9월에만 해도 저들은 사업의 확장을 이야기했었어. 공장위원회의 지난번 소식에도 공장 건물 하나를 추가로 더 건축할 것까지 얘기하고 있었어. 이건 단지 초과근무수당을 절약하려는 수작일 뿐이야!" 우리는 몇 분 더 이런저런 토론을 벌였지만 뭐니뭐니해도 …… 작업을 해야 했다. 기계들이 돌아가고 있으니 실을 집어넣어 줘야 했다. 모랭이 내 옆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봤어? 기계 두 개를 정지시켰어 …… 일이 줄어들 거야." 해고당할까 겁을 먹은 그 녀석은 내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여느 때보다 더 열심히 일을 계속했다. "무엇보다도 잘못 보이지 말 것." 역설적인 생각이 떠올라, 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파업하지 말자. 초과근무를 잃으니까"라고 전에는 말했었지만, 이제는 "파업하지 말자. 이젠 초과근무가 없으니까"로 변했다 .. (94∼95쪽)
누구한텐가 쥐어졌기에, 누군가 주머니를 털어 장만해 주었기에, 이 책 하나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헌책방 책꽂이에 꽂혔다가 제 손으로까지 옮아옵니다. 반가운 책을 가슴에 안고 기쁨에 겨워 책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지고 쓰다듬습니다. 나한테까지 와 주어 고맙구나. 반갑구나. 기쁘구나.
《김정환-페레스트로이카와 약한 고리 (1)》(민맥,1990)를 골라서 머리털 쥐어뜯으며 읽으려 하지만, 영 어려운 말만 가득하여 끝내 덮어 버리고 맙니다. 누가 읽으라고 쓴 책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 같은 사람 읽으라고 쓴 책은 아니겠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거나 나라안에서 교수나 지식인으로 일하는 사람들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니랴 싶습니다. 저는 저한테 걸맞는 책, 《기계들의 밤》을 파고들어야겠습니다.
신나게 책을 구경하다가 시계를 들여다보니 돌아갈 때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제 책 구경은 그만하자고 생각하며 셈대로 갑니다. 책값을 셈하는 동안 한 번 더 둘러보는데 《김병익-글 뒤에 숨은 글》(문학동네,2004)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새로 나왔을 때 몇 번 들춰보기는 했으나 다시 꽂아 놓았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들춰볼까? 헌책 값이면 반값이니 고맙게 장만해서 읽을까?
때때로 '어쩐지 새책으로 사기에는 어렵다고 느끼는' 책을 헌책방에서 고맙게 만나 장만하곤 합니다. 이런 책은 나중에 '잘 샀다'고 하는 느낌보다는 '괜히 샀다'는 느낌을 짙게 받습니다. 제 마음을 뭉클하게 움직이면서 너른 가르침을 베풀어 주는 책은, 새책으로 사건 헌책으로 사건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거든요. 단돈 이천 원에 사든 이삼만 원을 치르고 사든, 그 책에 담긴 글 한 줄만으로도 '이 책을 산 기쁨이 있다'고 느낍니다. 책을 샀으니까, 더욱이 좋은 책을 샀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고맙게 눅은 값으로 장만하는 《글 뒤에 숨은 글》은 어찌 되려나요. 잘 샀다고 느끼는 책이 될는지, 괜히 샀다고 느끼는 책이 될는지.
이래저래 망설이다가 《글 뒤에 숨은 글》까지 올려놓고 책값을 셈합니다. 헌책방 〈책창고〉 아저씨는 책값을 부르면서, "가끔은 이렇게 큰 선물 해 주는 것도 좋아." 하고 한 말씀.
그래, '큰 선물'로 생각하자. 이 책들을 집에서 좀더 찬찬히 다시 읽을 때에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나 모자람이 느껴진다면, 그런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나 모자람이 내 삶에는 깃들지 않도록 거울로 삼으면 될 노릇 아니겠는가. 이 책들을 거듭 읽으면서 반가움과 기쁨과 새로움을 느낀다면, 이런 반가움과 기쁨과 새로움을 달게 받아먹으면서 내 삶을 한껏 싱그럽게 가꾸어 나갈 노릇 아니겠는가.
책으로 즐겁게 배우는 하루입니다. 책을 다루는 헌책방 일꾼한테 말 한 마디로 고맙게 배우는 하루입니다. 부리나케 전철역으로 달려갑니다. 책방에서 좀더 머뭇거리느라 그만 네 시를 넘겨 볼일 볼 곳에 닿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남현동 〈책창고〉 / 02) 58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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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15:50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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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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