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 된 규운 윤기섭 선생.
국가보훈처
선생은 1887년 경기도 파주의 해평 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서울 보성학교를 제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에 종사하다, 신민회에 가입 후 그의 온 생애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윤기섭 선생은 1911년 8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를 설립하고, 산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여 10년간 학감 및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1920 년 2월 말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1년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1926년부터 임시정부 국무원으로 선임되어 군무장 등으로 활약한 선생은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 창당의 결실을 맺고, 당보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후 해방 후 고국으로 온 선생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족혁명당, 민족자주연맹 등에서 활동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납북 후에도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힘쓰던 선생은 북한정부에 항의하는 단식을 여러 차례 진행하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결국 1959년 향년 73세로 숨을 거두었다. 냉전시대 '납북'이라는 이유 때문에 평가받지 못하던 선생의 삶은 뒤늦게 1989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삼대가 망한다'던 독립운동, 문전걸식을 하던 어려운 시절..."세상물정 모르시던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모시고 실질적 가장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바가지를 들고 밥을 구걸해 나누어 먹기도 하며…."삼대가 망한다던 자조를 자아내던 독립운동. 남은 유족들의 삶 또한 피폐했다. 장녀인 윤경자(66,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여사는 어려웠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원망해 본 일이 없다며, '건국 60주년'이라는 단어에는 거침없는 비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