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300권 기념 시선집 표지.
창작과비평사
생각해보면 내 젊은 날은 창비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나는 갓 태어난 창비의 여러 가지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길렀다.
특히 창비시선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나오던 창비의 시집들을 통해 내 결핍된 정서의 한 부분을 채우곤 했다. 창비가 없었더라면, 혹은 창비시선이 없었더라면 틀림없이 난 지금보다 훨씬 메마르고 건조한 인간이 돼 있을 것이다. 창비시선 300권 출간을 누구보다 앞장서 축하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창비시선 첫 번째 책인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가 나왔을 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려고 광주에 내려갔던 차에 충장서림이란 서점에서 그 시집을 샀었다. 시집을 읽으면서 난 여러 가지 놀랍고 신기한 느낌에 젖었다.
첫 번째로 놀란 것은 시집 속에 담긴 내용 때문이었다. 수몰되기 전 내 고향마을의 풍경과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기 때문이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시 '농무') 화투를 치거나 술을 마시러 가버리는 남편이라는 위인들,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시고 주정을 서슴지 않던 몇몇 어른, 농한기가 되면 어느 집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기 육백이나 치던 아주머니들. 시집 <농무>가 보여주는 세계는 그렇게 그동안 내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풍경들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앞서 얘기한 바 있는 '그런 시시껄렁한 것도 시가 될 수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시란 관념적이고 고상한 것만을 다루는 것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시집 <농무> 속에 펼쳐진 시편들은 내게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세 번째로 놀란 것은 '시를 이렇게 이야기 식으로 쓸 수 있구나'라는 점이었다. 시집 <농무>의 시편들은 내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의 시였다. 또한 그 시들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이야기 시였다.
시집 <농무> 이래, 나는 창비 시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부지런히 사들였다. 민중시가 대세를 이루던 80년대에도 그랬고, "시의 시대는 갔다"라는 탄식이 지배하던 90년대에도 내 시집 구입은 여전했으며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냐?"라는 비아냥 섞인 말이 전혀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내 시집 구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나는 왜 꾸준히 시집을 사는가 혹은 시를 읽는가. 요즈음 내가 시를 읽는 이유라는 게 알고 보면 별거 아니다. 긴 글 읽기가 싫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 급격히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긴 글을 읽다 보면 중간 중간 문맥을 놓쳐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에 비하면 짧은 글인 시는 얼마나 읽기 쉬운가 말이다.
왜, 너무 싱거운 이야기라서 맥이 풀리는가. 시를 읽는 좀 더 그럴 듯한 이유를 대보라고? 굳이 이유를 대라면 대지 못할 것도 없다. 시 속엔 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혹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깨달음·깨침·선적인 번득임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난 그런 것들을 집에 앉아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 혹은 깨침이 든 시 한 구절을 얻기 위해 시인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을까를 생각하면 난 얼마나 손쉽게 그들의 지혜를 훔치는 셈인가.
또한 그 지혜가 들어 있는 시집이란 게 저렴하기 짝이 없다. 생맥주 두세 잔 값이면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이다. 그렇게 작은 돈만 투자하면 내 정신의 결핍을 빵빵하게 채워 넣는데 시집 사는 걸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창비시선과 요즘의 시에 대한 생각 듣자니, 요즘 출판사들은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라고 한다. 어디선가 유럽 같은 데서는 300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에 속한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시집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팔린 것인지 모른다. 시집이 아무리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더라도 국악 음반에 비하면 그야말로 "호강에 초친 소리"다. 국악인 중에는 출중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평생 자기 음반 하나 소장하지 못한 채 생을 마치는 분들도 있다. 그분도 불행하지만 국악 애호가의 처지에서도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국악 음반을 발매하는 음반사에선 그저 1000장 정도라도 팔리기만 하면 본전치기할 셈치고 음반을 내드리고 싶지만, 그 정도마저도 팔리지 않으니 음반을 내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분들을 위해 개인 돈을 들여 음반을 내주는 일을 하는 정창관씨 같은 분도 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음반을 가리켜 '사가반(私家盤)'이라 한다. 개인이 내는 음반이란 뜻이다.
이 기회에 한 가지 더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요즘 나오는 창비시선들을 보면 더러 시적 긴장이 매우 떨어지는 시집이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 맛보기로 보여주는 시 한 편을 읽어보고 나서 '아, 이 시집에 담긴 시들 참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시집을 사서 읽어보고서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땐 '시집 발간도 음반의 예를 따르는 게 어떨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대중가요계가 더러 한 곡이나 두 곡을 담아 싱글(single) 음반으로 판매하듯이 말이다.
시적 긴장이 풀어진 시가 널려 있는 현실 말고도 시가 외면 당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번 시선집을 내면서 창비가 '사람'을 주제로 작품을 고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출판사 측에선 '사람'을 주제로 시를 고른 이유에 대해 "기계화·부품화되다시피 버려지는 인간을 향해 그칠 수 없는 애정과 따듯한 시선을 던지는 일은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시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며, 이는 1975년 첫 시집을 출간한 이래 창비시선이 견지해온 정신이기도 하다"라고 언명한다.
그렇게 창비정신을 새삼스럽게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동안 창비시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시집 가운데 '사람'을 주제로 하지 않은 시집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출판사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창비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는 제발 알아들을 듯 못 알아들을 듯한 허망한 관념으로 끓어 넘치는 그런 시는 다른 출판사에 맡기고 창비는 앞으로도 죽 '사람'을 주제로 한 시집을 발간했으면 싶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하자. 이 시집을 박형준·이장욱 두 분이 엮은 것으로 돼 있다. 두 분 모두 훌륭한 작품을 쓰시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이제 막 40줄에 접어든 젊은 분이라서 나 같은 나이 든 사람과는 시에 대한 취향이나 안목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선정작업에 참여한 두 분께선 "각 시인의 한두 권의 시집에서 '사람과 삶'을 주제로 하나의 작품만을 뽑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나라고 왜 그 노고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86편의 시를 읽으면서 '왜 이 시인의 시집 가운데서 꼭 이 시를 골라야 했나?''라는 생각을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이유가 어쩌면 삶의 연륜에서 오는 차이 같은 게 아닌지 모르겠다. 연령대별로 골고루 시인을 고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40대 한 분, 50대 한 분 이렇게 뽑았으면 치우침이 조금 덜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
사람 냄새 나는 시집 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난다>는 시집 제목 그대로 지난 35년 동안 창비시선이 걸어온 자리마다 많은 별들이 우뚝 서 있었다. 고은의 <새벽길>,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김용택의 <섬진강>, 조태일의 <국토>,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등 창비라는 별밭에 자리한 숱한 별들이 어두운 시대를 비춰주었기에 나 같은 독자들은 그 별빛을 헤치며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거듭 창비시선 300권 발간을 축하드리면서 글쓰기 혹은 출판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실감케 해주는 기념 시선집에 든 시 한 편을 맛보는 것으로 중언부언 가득찬 글을 맺는다.
최명희 씨를 생각하면 작가의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같은 것이 느껴진다. 1993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중국 연길 서시장을 구경하고 있다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 커다란 취재노트를 든 최명희 씨를 우연히 만났다. 「혼불」의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 이제 막 거기까지 왔는데 며칠 후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너무 바가지를 씌우는 바람에 그런 옷을 입었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김학철 선생 댁엘 들르기로 되어 있어 같이 갔는데 깐깐한 선생께서 모르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어찌나 퉁박을 주던지 민망해한 적이 있다. 그후 서울에서 한번 더 만났다. 한길사가 있던 신사동 어느 까페였는데 고정희와 함께 셋이서 이슥토록 맥주를 마신 것 같다. 밤이 늦어 방향이 같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탔을 때였다. 도곡동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이형, 요즈음 내가 한달에 얼마로 사는지 알아? 삼만원이야, 삼만원... 동생들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모두 거절했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어?" 고향 친구랍시고 겨우 내 손을 잡고 통곡하는 그를 달래느라 나는 그날 치른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하기 힘든 얘기를 내게 했는지를. 그러자 그만 내 가슴도 마구 미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혼불」은 말하자면 그 하기 힘든 얘기의 긴 부분일 것이라고.- 이시영 시 '최명희 씨를 생각함' 전문
덧붙이는 글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창비 / 2009.4.27 / 책값 9000원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박형준 외 엮음,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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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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