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청렴했던 경세가, 황희
방촌은 잘 알다시피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다. 하지만 고려말기에 고려의 임금을 섬기었다는 이유로 반대세력에 지탄을 받기도 했다. 황희 선생이 30세 되던 해에 역성혁명(이성계) 일어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두문동을 들어갔던 일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태종 이후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한 '삽살개 동네'라는 그의 아호에서 느낄 수 있듯 강직한 관리의 면모를 보였다. 양영대군의 폐 세자를 반대했고, 그가 병조판서 시절 의정부회의에 참석한 당시 김종서의 자체가 이상하자 "여봐라, 병판대감 의자 한쪽이 짧은가 보다. 빨리 고쳐드려라"라고 큰 소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황희 선생은 국사를 의논할 때는 시시비비를 한사코 가려내며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을 펼쳐왔다. 그래서 60여 년의 관리 생활 동안 태종 이후 세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지만 좌천이 2번, 파직이 3번, 귀양 생활이 4년이었다.
이처럼 강직한 황희 선생에게도 일생일대의 오점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전략)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寬大)하여 제가(齊家)에 단점(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풍문(風聞)에서 나왔다고 글을 올려 변명하여 구(救)하였다. 또 그 아들 황치신(黃致身)에게 관청에서 몰수(沒收)한 과전(科田)을 바꾸어 주려고 하여 또한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또 황중생(黃仲生)이란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서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 죄를 범하니 곧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변성(變姓)하여 조(趙)라고 하니,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후략)"
이러한 기록에서 보듯 황희 선생이 사소한 일에는 관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탐관오리의 실리를 추구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청빈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청렴함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8년을 정승으로 지냈으니 나라의 급여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당시 정승의 녹봉이 쌀 100섬이었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그만큼의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청렴함이 꼭 가난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나랏일을 진정으로 걱정하며 옳은 일을 도모하며, 부정부패에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 바로 '청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신을 가지고 방촌에 내려와 여생을 마친 황희 선생. 물론 지금이야 남북으로 갈라져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지만 저 멀리 고려의 개성이 보이는 그곳에서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의 나랏일을 쉼 없이 걱정했으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니 반구정에 갈매기를 벗 삼아 서 있던 황희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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