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의 얼이 깃든 황희 선생 유적지를 찾아서

[청렴 여행 1] 60년 여년 나랏일을 걱정하며 살다간 청렴한 선비 황희 선생

등록 2009.04.26 14:26수정 2009.04.26 15:30
0
원고료로 응원
 황희 선생이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는 <반구정>
황희 선생이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는 <반구정>강경희
황희 선생이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는 <반구정> ⓒ 강경희

경기도 파주. 몇 년 전만 해도 파주를 말하면 임직각, 드라이브 코스 등 몇 가지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헤이리 마을' 덕분에 일반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드라이브를 하면서 차창 밖으로 지나친 것이 있다. 예술인들의 마을, 헤이리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아니, 몇 백 년 전 파주에는 우리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곳은 철조망 너머로 소총을 겨눈 군 초소 위 언덕배기에 몇 백 년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정자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이름 하여 '반구정(伴鷗亭)'이라 한다. 조선 초기 정승을 여러 번 지내며 청백리로 불리었던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 선생의 자취가 숨어 있는 곳이다. 그의 진한 향기를 우리는 그동안 스쳐지나가 맡지 못한 모양이다.

 

갈매기를 벗 삼아 말년을 보낸 황희

 

반구정은 문산 사목리의 황희 선생 사적지 안에 있다. 자유로를 달라다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시골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좀 더 가다 보면 자유로 밑으로 난 굴다리를 만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황희 선생의 사적지로 가는 길목이다. 그곳은 조금씩 이름이 알려져 사람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지만 몇 년 전에는 발길이 뜸해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파주는 황희 선생과 남다른 인연이 있는 곳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파주 적성현에 훈도로 오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며, 68세에 사헌부의 상소로 파직되어 파주 반구정으로 물러났다. 86세에 부인이 사명하여 묻힌 곳도 파주 탄현면이고,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며 여생을 보낸 곳이 파주이기도 하다.

 

황희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 파주. 사적지에 들어서 가장 먼저 반구정을 찾았다. 본래 반구정은 낙하정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황희 선생의 생전에 임진강 나루터인 낙하진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이 돌아가신 뒤 후손들이 중건하면서 '반구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반구정의 뜻은 '방촌이 관긱에서 물러나 갈매기(鷗)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란 의미이다. 반구정은 황희 선생의 업적만큼이나 고풍스러우며 번듯하게 생겼다. 허나 번듯하게 생긴 반구정도 시련은 있었다.

 

한국전쟁 때 불이 나 개발 독재 시대에 1967년 시멘트로 개축되어 그 멋스러움이 감소되기도 했다. 그 후 1998년에야 비로소 지금의 나무집으로 원형을 되찾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곳에서 나랏일을 걱정하며 여생을 보냈던 황희 선생을 떠올리니 불쑥 숙연함이 찾아온다. 그 옆으로 앙지대(仰止臺)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앙지대를 따라 돌길을 내려오면 황희 선생의 유업을 기리는 방촌영당(尨村影堂)을 만날 수 있다. 그곳은 말 그래도 황희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사람들의 하나 둘 향을 피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을 선생의 재실인 갱모재와 동상이 줄지어 서 있어 황희 선생의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임진강 너머 철조망이 보이듯 이곳은 한국전쟁 때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가끔 들리는 북한 대남 방송을 들을 수 있지만 한국전쟁의 상흔을 의식하지 않고는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이곳도 역시나 영당과 재실도 전쟁으로 인해 불이 났다. 1962년에 다시 한 번 개축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이다.

 

 파주에는 방촌영당, 앙지대, 방촌기념관, 동상 등 황희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파주에는 방촌영당, 앙지대, 방촌기념관, 동상 등 황희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강경희
파주에는 방촌영당, 앙지대, 방촌기념관, 동상 등 황희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 강경희

누구보다 청렴했던 경세가, 황희 

 

방촌은 잘 알다시피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다. 하지만 고려말기에 고려의 임금을 섬기었다는 이유로 반대세력에 지탄을 받기도 했다. 황희 선생이 30세 되던 해에 역성혁명(이성계) 일어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두문동을 들어갔던 일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태종 이후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한 '삽살개 동네'라는 그의 아호에서 느낄 수 있듯 강직한 관리의 면모를 보였다. 양영대군의 폐 세자를 반대했고, 그가 병조판서 시절 의정부회의에 참석한 당시 김종서의 자체가 이상하자 "여봐라, 병판대감 의자 한쪽이 짧은가 보다. 빨리 고쳐드려라"라고 큰 소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황희 선생은 국사를 의논할 때는 시시비비를 한사코 가려내며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을 펼쳐왔다. 그래서 60여 년의 관리 생활 동안 태종 이후 세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지만 좌천이 2번, 파직이 3번, 귀양 생활이 4년이었다.

 

이처럼 강직한 황희 선생에게도 일생일대의 오점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전략)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寬大)하여 제가(齊家)에 단점(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풍문(風聞)에서 나왔다고 글을 올려 변명하여 구(救)하였다. 또 그 아들 황치신(黃致身)에게 관청에서 몰수(沒收)한 과전(科田)을 바꾸어 주려고 하여 또한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또 황중생(黃仲生)이란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서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 죄를 범하니 곧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변성(變姓)하여 조(趙)라고 하니,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후략)"

 

이러한 기록에서 보듯 황희 선생이 사소한 일에는 관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탐관오리의 실리를 추구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청빈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청렴함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8년을 정승으로 지냈으니 나라의 급여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당시 정승의 녹봉이 쌀 100섬이었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그만큼의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청렴함이 꼭 가난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나랏일을 진정으로 걱정하며 옳은 일을 도모하며, 부정부패에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 바로 '청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신을 가지고 방촌에 내려와 여생을 마친 황희 선생. 물론 지금이야 남북으로 갈라져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지만 저 멀리 고려의 개성이 보이는 그곳에서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의 나랏일을 쉼 없이 걱정했으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니 반구정에 갈매기를 벗 삼아 서 있던 황희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파주 헤이리 예술 마을의 위치한 북하우스
파주 헤이리 예술 마을의 위치한 북하우스 북하우스
파주 헤이리 예술 마을의 위치한 북하우스 ⓒ 북하우스

오두산 통일 전망대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헤이리 예술마을은 예술인들의 손으로 만든 문화예술공간이다. 마을 이름은 경기 파주 지역에 전해져오는 전래농요인 '헤이리 소리'에서 따왔다는 그곳은 예술인들의 삶과 작업, 전시공간으로 1997년 문을 열었다.

 

15만 평에 이른 그곳에 작가, 미술인, 영화인, 건축가, 음악가 등 370여 명의 예술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집과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같은 공간들은 고스란히 거대한 화폭 위에 그려진 그림이나 조각처럼 방문자들의 눈길을 끈다. 아이들과 함께 들러도 반나절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만큼 재미와 신기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문의 : http://www.heyri.net

 

덧붙이는 글 | 부정부패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청렴여행] 연재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내 아이의 교육을 위해 시작한 작은 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바랍니다. 앞으로 [청렴여행-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09.04.26 14:26ⓒ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부정부패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청렴여행] 연재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내 아이의 교육을 위해 시작한 작은 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바랍니다. 앞으로 [청렴여행-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청렴 #반구정 #황희 선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상뉴스 전체보기

추천 영상뉴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3. 3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4. 4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5. 5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