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에 담아놓으니 마음이 흐~뭇!
한미숙
예천은 어머니가 나고 자라 열여섯 시집 갈 때까지 살던 친정 고향이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그곳은 지금도 대전에서 내리 3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한다. 시골동네를 들어서면서부터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어서 외지에서 누가 오기라도 하면 마을 전체가 시끄러워진다.
어머니는 일년에 두세 번, 이렇게 예천의 친정고향 나들이를 거하게(?) 하신다. 봄이면 된장, 여름엔 감자, 가을이면 양파를 아들딸네 집마다 들여보내야 마음이 흡족하신 것이다. 꽃피고 새우는 고향, 인심 좋은 깊은 산골에서 약도 안한 우리농산물을 해마다 자식들에게 먹이는 것을 거르지 않는 것이다. 된장은 그 중 맨 나중이었다.
예천시골된장을 먹기 전에는 어머니와 큰시누가 된장을 집에서 직접 담그셨다. 때때로 친정엄마도 된장을 나눠주시곤 했다. 내게 된장과 고추장은 공기로 숨쉬는 일이 당연하듯,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얻어먹었던 음식이었다.
아들 며느리 입맛 사로잡은 토종된장이러구러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어느덧 구십을 넘으셨다.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 생일까지 기억하는 총기는 여전하신데, 나날이 줄어드는 기력과 숨조차 가쁜 체력은 누구라도 어쩌지 못했다.
어머니가 해오시던 된장 담기는 환갑이 넘은 큰딸(내겐 큰시누)에게 모두 넘어갔다. 하지만, 매번 장을 직접 담아먹기엔 큰시누도 버거웠다. 직장 다니는 아들네 부부의 올망졸망한 손녀손자를 돌보느라 된장엔 짬을 낼 수조차 없었다. 그 여파로 우리는 마트에 나와 있는 포장된장을 사먹기도 하였다.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네 집에서 예천시골된장 맛을 본 아들딸며느리는 한결같이 마트에서 포장된 된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머니 드셔보라고 예천에서 조금 보내온 된장은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된장 사먹을 거면 예천에 부탁해볼까?" 어머니 말씀이 떨어지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쌍수를 들어 어머니 의견에 만장일치가 되었다. 그때부터 예천시골된장이 해마다 이맘 때 대전으로 오게 되었다. 된장은 시골과 도시의 다리가 되고 어머니는 안내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