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 새댁, 퀴퀴한 토종된장에 넘어가다

된장의 맛 알려준 시어머니의 불편한 선물

등록 2009.05.06 09:07수정 2009.05.0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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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 가지러 요번 토요일에 예천 갈 건데 너 갈래?"
"이번 토요일요? 저, 그날 시간 안 되는데..."
"그려? 할 수 없지 뭐. 그람 된장 값이나 준비혀."
"예~ 엄니. 죄송해유, 담엔 꼭 갈께유."
"담에 언제? 오늘 갈지 낼 갈지두 모르는데 뭔 약속을 혀?"


 얼마 전에 어머니가 갖다주신 예천시골토종된장.
얼마 전에 어머니가 갖다주신 예천시골토종된장. 한미숙

 우리식구 한 해동안 맛나게 먹을 시골토종된장.
우리식구 한 해동안 맛나게 먹을 시골토종된장. 한미숙

전화를 끊고 나니 어머니 말씀 한마디가 목에 걸린다. 어머니 말마따나 세상을 아주 떠날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르는 당신 연세가 올해 아흔셋이시다. 그런 노모가 여기저기 주문받은 된장을 가지러 대전에서 경북 예천까지 가는데, 며느리는 시간이 안 된단다. 피곤을 가장한 며느리의 나태를 어머니가 모르지 않으리라. 다시 가겠다고 전화를 걸까 망설이다가 나는 그냥 불편한 마음을 견디기로 했다.

된장을 가지러 막내 시동생과 작은시누이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는 한다. 어느 때는 큰시누부부와 시동생이 간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앉아서 받아먹는 얌체 아들며느리인 셈이다.

일년에 두세 번, 고향 나들이 하시는 시어머니

예천에 된장 '일'이 잘 이뤄지기 위해선 어머니가 빠질 수 없다. 그곳엔 어머니보다 더 연세가 많으신 호호할머니가 계신다. 어머니는 그분에게 형님이라고 하신다. 그 형님의 며느리가 큰시누 연배쯤 되니 아마 회갑을 넘긴 지도 4, 5년은 되지 싶다.

그런데 며느리의 남편, 그러니까 우리 시어머니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예천 호호할머니의 외아들이 3년 전에 사고로 그만 세상을 놓았다. 그것도 새집을 짓고 얼마 되지 않아서 산에 나무를 베러갔다가 일이 잘못되어 그리 된 것이다. 어머니는 형님과 조카내외(호호할머니 아들과 며느리)의 안타까운 얘기를 하실 때마다 언제나 눈물을 찍어내셨다.


 항아리를 옆에 놓고 옮겨 담아야 한다. 햇빛에 잘 익도록 자주 뚜껑을 열어 줘야지.
항아리를 옆에 놓고 옮겨 담아야 한다. 햇빛에 잘 익도록 자주 뚜껑을 열어 줘야지.한미숙

 
 항아리에 담기 전, 묵은 된장 두 병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다.
항아리에 담기 전, 묵은 된장 두 병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다. 한미숙

 항아리에 담아놓으니 마음이 흐~뭇!
항아리에 담아놓으니 마음이 흐~뭇! 한미숙

예천은 어머니가 나고 자라 열여섯 시집 갈 때까지 살던 친정 고향이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그곳은 지금도 대전에서 내리 3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한다. 시골동네를 들어서면서부터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어서 외지에서 누가 오기라도 하면 마을 전체가 시끄러워진다.

어머니는 일년에 두세 번, 이렇게 예천의 친정고향 나들이를 거하게(?) 하신다. 봄이면 된장, 여름엔 감자, 가을이면 양파를 아들딸네 집마다 들여보내야 마음이 흡족하신 것이다. 꽃피고 새우는 고향, 인심 좋은 깊은 산골에서 약도 안한 우리농산물을 해마다 자식들에게 먹이는 것을 거르지 않는 것이다. 된장은 그 중 맨 나중이었다. 


예천시골된장을 먹기 전에는 어머니와 큰시누가 된장을 집에서 직접 담그셨다. 때때로 친정엄마도 된장을 나눠주시곤 했다. 내게 된장과 고추장은 공기로 숨쉬는 일이 당연하듯,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얻어먹었던 음식이었다.

아들 며느리 입맛 사로잡은 토종된장

이러구러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어느덧 구십을 넘으셨다.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 생일까지 기억하는 총기는 여전하신데, 나날이 줄어드는 기력과 숨조차 가쁜 체력은 누구라도 어쩌지 못했다.

어머니가 해오시던 된장 담기는 환갑이 넘은 큰딸(내겐 큰시누)에게 모두 넘어갔다. 하지만, 매번 장을 직접 담아먹기엔 큰시누도 버거웠다. 직장 다니는 아들네 부부의 올망졸망한 손녀손자를 돌보느라 된장엔 짬을 낼 수조차 없었다. 그 여파로 우리는 마트에 나와 있는 포장된장을 사먹기도 하였다.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네 집에서 예천시골된장 맛을 본 아들딸며느리는 한결같이 마트에서 포장된 된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머니 드셔보라고 예천에서 조금 보내온 된장은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된장 사먹을 거면 예천에 부탁해볼까?"

어머니 말씀이 떨어지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쌍수를 들어 어머니 의견에 만장일치가 되었다. 그때부터 예천시골된장이 해마다 이맘 때 대전으로 오게 되었다. 된장은 시골과 도시의 다리가 되고 어머니는 안내자가 되었다.

 재작년(2007년) 어머니가 우리집에 오셔서 예천시골된장을 항아리에 옮겨 주셨다. 조그마한 울 시엄니~ 내년엔 엄니랑 꼭 같이 갈게요.
재작년(2007년) 어머니가 우리집에 오셔서 예천시골된장을 항아리에 옮겨 주셨다. 조그마한 울 시엄니~ 내년엔 엄니랑 꼭 같이 갈게요. 한미숙

남편 옆에서 집안의 소소한 일을 주로 하던 예천의 며느리는 남편이 죽자 집안의 모든 농사일을 홀로 떠맡게 되었다. 집에는 호호할머니인 시어머니가 있었지만 농사를 돕기엔 너무 늙으셨다. 며느리는 남편을 생각하며 밭에서도 울고 논에서도 울었단다.

어머니는 예천의 조카내외 사정을 딱하게 여기며 시골에 가셔서는 쌈짓돈을 풀었다. 예천에서 올라온 감자는 파근파근 분이나서 찐감자를 좋아하는 우리식구들에게 아주 적절한 간식이 되었다. 양파는 단단하고 달큰한 게 어찌나 야무진지 가을에서 겨우내 까지 햇것이 나올 때까지 양파 사는 일은 잊어버린다.

몰래 햄버거 먹던 새댁, 지금은

시골에 다녀오시면서 어머니는 내년 된장을 부탁하고 오신다. 깊은 산골짝에서 메주콩을 직접 심고 거둬서 된장이 되기까지 홀로된 조카며느리의 정성담긴 된장 맛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결혼 20년차, 아침저녁으로 거의 날마다 된장찌개나 된장국을 끓인다. 그러면서 철든다는 것은, 철에 따라 제대로 먹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시 세끼 때마다 된장을 끓여 드시는 어머니의 식습관이 이제야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아침으로 빵에 잼을 발라먹고, 햄버거를 즐겨먹던 결혼 전의 내 음식취향은 결혼과 동시에 멈췄다. 하루 아침에 금연을 하던 흡연자가 금단증상을 보이듯, 갑자기 바뀐 음식으로 내 뱃속은 너무나 헛헛했다. 아침마다 끓여대던 된장찌개 냄새에 진저리가 쳐져도 어려운 시집살이에 내색할 수 없었던 나는 시어머니 몰래 동네 슈퍼에서 햄버거를 사먹던 철없던 새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하루에 한번이라도 된장 넣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뱃속이 불편하다. 뭘 먹어도 뭔가 개운하지 않다. 어쩌다 외식이라도 하면 그 다음날 된장찌개는 더 기가 막힌 맛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이제 철이 드나보다. 누리끼리한 색깔에 냄새도 퀴퀴해서 좀체 그 참맛을 몰랐던 내가 어머니의 선물 덕분에 철들게 되었다. 아둔한 며느리는 20년이 다 되서야 된장의 참맛과 그 귀한 가치를 알았다. 

때마다 나오는 채소들은 된장찌개를 끓일 때 모두 넣어 먹는다. 탱탱한 애호박을 넣기도 하고 쭈글쭈글 말린 호박고지를 넣어도 좋다. 감자, 부추, 버섯, 대파... 어느 것을 넣고 끓여도 참 잘 어울리게 맛을 내는 된장은 먹을거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달력을 보니 벌써 초여름이다. 아흔셋 어머니가 내년에도 내게 된장 가지러가자고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나른하고 매가리 없는 중년며느리를 깨우는 어머니의 불편한 선물, '된장'은 내년에도 쭉~ 계속되리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선물'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선물' 응모글입니다.
#된장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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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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