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식은 학교에 가다가 삼선평 길에서 우연히 국(鞠) 선생을 만났다. 그는 동아일보에 가끔 글을 쓰며 성북동 골짜기에서 조용히 살던 사람이었다. 김성식은 학창 시절 여름에 그의 집에 놀러가 며칠 폐를 끼친 일이 있었다. 국 선생은 행색이 유달리 초췌해 보였다.
"선생님, 걱정되시는 일이 있으십니까?"
"내 딸이 돈암국민학교 직원이었고 사위는 같은 학교 교원이었는데 그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인민군 보위부에 잡혀 갔었소. 그래서 내 딸아이가 남편을 구해내려고, 반동 가정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여맹의 일을 잠시 도왔는데 그것이 동티가 나서 지금 헌병대에 체포되어 있다오. 사위는 인민공화국에 잡혀가 행방불명이고 딸은 대한민국 헌병대에 구금되었으며 외손들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 밤낮으로 보챈다오."
국 선생은 호젓이 웃었다. 김성식은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어찌 이 가정뿐이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 날 밤 일기에다 적었다.
- 앞으로 우리나라가 잘되고 못됨은 사람을 얼마나 포용하느냐 배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물론 광신적인 빨갱이야 통치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가려내 처벌해야 하겠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다 달아나고 없다. 인공국 시절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득이 협력하는 체한 사람들을 샅샅이 뒤져낸다면,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도 끝도 없을 터이다.
"나는 악질로 굴지 않았으니 나를 처벌하지는 않겠지?"하고 자위, 자부하는 사람들까지 잡아 족친다고 해서 무슨 득이 되겠는가? 그것은 정치력의 빈곤을 자백하는 일이고 권력의 비명분성을 위장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는다.
10·1 사건 때 보나 이번 사변으로 보나, 녹아나는 사람들은 비교적 중립적인 선량한 백성들이다. 악질들은 제 한 깐이 있으니까 미리 다 도망해 버리고, 어중뻥뻥한 사람들이 잡혀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앞으로 복구와 건설에 얼마든지 할 일이 많은데, 일껏 우리 편으로 돌아설 수 있는 사람들을 왜 밀어내어 적으로 돌린단 말이냐?
참으로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다. 이번 전란에 물적인 손실도 크지만 인적 손실이 더 컸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물건이야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급하면 빌려다 쓸 수도 있지만, 사람 하나에는 수십 년의 공력이 들지 않는가?
우리나라는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했는데, 8·15 해방 후 좌익이 활발히 움직여 유능한 사람이 대거 그쪽으로 갔고, 이번에도 전쟁을 겪으며 더 그쪽으로 많이 간 것이 사실이다. 이래저래 똑똑한 사람들이 좌익과 관계를 맺게 되어, 우리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 아쉽고 애석한 터에, 지금 남아 있는 중립인들까지 좌익으로 몰아내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이것은 민족의 자살 행위로서 그 후유증이 길고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다알리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고택 주변에는 온통 노란 은행잎이 깔려 있었다. 수묵 빛 건물과 어우러져 빨간 감들이 열려 있었다. 그 위로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요지부동으로 떠 있는 뭉게구름은 전쟁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정겨운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추사의 묘는 고택 남쪽에 있었다. 이두오는 무덤 가까이로 다가가 노랗게 깔린 은행잎 더미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는 했다.
그는 화첩을 꺼내 펼쳤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밝은 가을 햇살 아래서도 전혀 선명한 빛을 잃지 않았다. 신비해 보이는 화초들과 안개가 머물고 있는 숲과 폭포수에 머리를 적시고 있는 누드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조수현이 남기고 간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화첩을 펼쳐 보고, 그녀가 써 주고 간 편지를 읽는 일은, 어느덧 이두오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어 있었다. 그는 시골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유엔군에게 내주었고 학부생들은 이 학교 저 학교의 강의실을 빌려 개강했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대학원이나 연구소는 정상화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고 했다.
김성식과 그의 가족들이 보고 싶었지만 그런 일로 험난한 상경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빨치산이 출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군과 미군도 그들 못지않게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신분과 여행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체포되어 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무엇보다 그는 조수현에 대한 걱정으로 연구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국군과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다는데 그녀는 어찌 되었는지? 이두오는 생사조차 분명치 않은 한 여인에 대한 근심과 그리움으로 삶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위에서 조수현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그래서 그녀 앞에서 직접 지어보이는 눈빛과 표정을 머금을 때가 자주 있었다.
앞산 아래 마을에서 연기가 지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두오의 눈빛은 연기를 따라 하늘로 오르다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랬다가 얼른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연기가 사라진 공간에 조수현의 눈동자가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며 어스름이 깊어지고 샛별이 반짝거릴 때까지 그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별들이 하늘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조수현이 함께 초점을 맞추자고 한 직녀성이 있는 거문고자리는 여름 하늘에서는 뚜렷이 빛나는 별들이었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현저히 빛을 잃어갔다. 그래서 아무나 직녀성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직녀성은 미세한 하나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수현 씨, 옛날 거문고의 명인 올페우스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느 날 불행히도 뱀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올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금기를 깨고 아내가 있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거문고를 켜면서 천국의 왕에게 애원했습니다.
"제발 사랑하는 나의 아내를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 주소서."
그의 거문고 연주는 천국의 왕을 감동시켰습니다. 왕은 올페르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단, 지상에 도달하기까지는 절대로 아내의 얼굴을 보지 말라."
올페우스는 앞장섰고 그 뒤를 아내가 따랐습니다. 지상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올페우스는 정말 아내가 자기를 따라오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왕의 경고를 잊어먹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결국 아내는 다시 천국으로 끌려갔습니다.
올페우스는 아내만을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홀로 된 그를 유혹하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앙심을 품은 여인들은 올페우스를 강변에 데려가 찢어 죽였습니다. 그 후 주인 잃은 거문고 하나가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제우스가 거문고를 건져 하늘에다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거문고자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군의 조선 참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1950년 11월 하순, 평안북도 삭주군 대유동. 그곳에 조수현의 막사 겸 근무처가 있었다. 그 해 따라 유독 일찍 찾아온 혹한으로 북부의 산하는 온통 얼어붙어 있었다. 영하 25도를 오르내리는 냉기와, 바위만큼이나 견고한 동토(凍土)는 사람의 마음은 물론 심장까지 싸늘히 식힐 정도였다.
뾰족한 침엽수와 산봉오리들, 가냘프고 서럽게 차가운 하늘이 눈에 보이는 자연의 전부였다. 미군의 폭격기들은 삼수갑산에까지도 간단없이 출몰하고는 했다. 급박한 전황으로 그녀의 부대는 감찰 업무를 잠정 중단하고 인민군 사령부 지원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최근 이루어진 중국군 파병을 조수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미 제국주의에 맞서 전군이 옥쇄를 다짐하던 비장한 상황이었다. 인민군 수뇌부는 절망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중국군 파병을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였지만, 뜻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고뇌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미군의 참전을 외세의 부당한 간섭이라고 비방하던 입으로 중국군의 참전을 마냥 당연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군 지원사령부는 인민군부대 건물 옆에 나란히 있었다. 그곳에는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부임해 있었다. 펑더화이는 파병을 주저하던 모택동과 파병을 반대하던 주은래를 설득하여 조선 파병을 실현시킨 인물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중국군의 명칭은 인민군 지원사령부였지만 조수현의 부대는 지원사령부를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2009.05.11 11:22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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