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초라한 덩샤오핑 서거 10주년 기념식 무대. 덩의 마을을 찾은 중국인들은 추모객이 아닌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한 관광객들이었다.
모종혁
덩샤오핑과 노무현, 추모의 차이
1997년 2월 19일 중국인들은 20년 가까이 중국을 이끌어 온 정치 지도자 한 명을 잃었다. 바로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자로 추앙되는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중국에 있어 덩은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인물이었다. 덩은 젊어서는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고, 공산주의혁명 이후에는 정권의 기틀을 닦은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늙어서는 폐쇄되고 낙후한 중국을 현대화시킨 노련한 정치가였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해리슨 솔즈베리는 1992년 출판한 <새로운 황제들: 마오와 덩 시대의 중국>에서 '중국 현대사에서 황제로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그런 '황제'가 서거한 3일 뒤 기자는 중국 수도인 베이징에 가보았다. 기자는 덩의 유해가 안치된 분향소인 인민대회당 앞 톈안먼(天安門) 광장,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서민들이 몰려 사는 후퉁(胡同) 골목, 아직 개학하지 않은 대학가 등지를 수없이 걷고 이름 모를 중국인들을 만났다.
당시 베이징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기자가 만난 중국인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덩샤오핑의 죽음을 기리는 '공식적인' 애도사는 누구나 꺼냈지만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었다.
식당과 술집에서 만난 몇몇 중국인들은 억눌린 듯한 추모 분위기가 빨리 끝나길 바라기까지 했다. 덩의 영결식이 있었던 2월 24일 톈안먼광장에는 수만 명의 중국인이 몰렸지만, 뜨겁고 절절한 애도의 강도는 크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기자는 덩샤오핑 서거 10주년을 취재하기 위해 덩의 고향인 쓰촨(四川)성 광안(光安)시에 갔다(
관련기사-중국인들은 더 이상 그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덩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에서 열린 기념식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기념식 주관단체는 쓰촨성 정부나 광안시 정부가 아닌 덩샤오핑 고향마을 관리소와 광안시 TV방송국으로, 정부 차원의 성대한 기념식이 아닌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성 행사였다.
실제 광안을 찾은 대다수 중국인들은 덩의 죽음을 되새기고 추모하기보다는 기념사진을 남기기에 바빴다. 개혁개방정책과 선부론으로 중국을 부강케 한 덩은 중국인들에게 더 이상 그리움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중국인들에게 한국에서 보인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열기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