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부르는 책... 결국 낮술을 마시다

사막 여행기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등록 2009.06.02 12:48수정 2009.06.0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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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부르는 책이다. 이게 무슨 술 귀신 붙은 책인가? 참다 못해 결국 한낮 맥주 1.5리터를 사서 벌컥벌컥 비웠다. '커.'

 김준희가 쓴 여행서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우리나라 땅 크기 세 배가 넘는 키질쿰사막을 건너 중앙아시아를 호령한 대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김준희가 쓴 여행서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우리나라 땅 크기 세 배가 넘는 키질쿰사막을 건너 중앙아시아를 호령한 대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다.솔지미디어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부제 : 실크로드 1200km 도보횡단기)(김준희, 솔지미디어)가 술을 부른 원흉이다.


탄탄한 벤처기업에서 일 잘하던 김준희씨는 어느날 직장을 그만둔다. 자유롭고 싶어서, 라는 게 이유다. 이후 전 세계를 누빈다. 러시아 바이칼 호수,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마다가스카르 등 사람보다는 동식물이 활개를 칠 만한 곳만 골라 다녔다. '고생 제대로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실크로드의 땅, 중앙아시아의 평원에서>와 <바오밥나무와 여우원숭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번 책은 세 번째다. 글쓴이는 지금껏 여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떠난 이유를 '나태했던 여행 때문'이라고 썼다.

"그동안의 나태했던 여행이 왠지 후회돼서 이번에는 좀 더 힘든 여행 속으로 자신을 던져보고 싶었다. 장거리 도보여행을 통해서 육체를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고, 말이 안 통하는 낯선 장소, 언제 물과 식량을 구할지 모르는 환경 속에서 나의 정신을 긴장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태한 자신을 사지(?)로 밀어넣기 위해 선택한 곳은 우즈베키스탄. 땅 크기가 44만7400㎢로 남한(9만9538㎢)의 네 배가 넘는다. 핵심은 크기가 30만㎢에 이르는 키질쿰 사막. 이곳을 통과하는 게 목표다. 즉 '우즈베키스탄 여행'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사막 횡단 여행인 셈이다. 나태한 자신을 깨우거나 나자빠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사막을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도 괴로울 텐데, 글쓴이는 걸어서 건너겠다고 밝혔다. 4년간 실크로드 전체를 여행한 베르나르 올리비에(Bernard Olivier), 일본 열도 3000km를 55일 만에 혼자 걸은 우에무라 나오미(Uemura Naomi), 고비사막을 단독 횡단한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8년째 전 세계 도보여행 중인 장 벨리보(Jean Beliveau)가 글쓴이의 선배다.


20km 그늘 없는 지겨운 사막, 도대체 왜 간 거야

책장을 열자 열기가 후끈거린다. 여행을 떠난 때는 8월 28일부터 10월 7일까지. 더운 때다. 사막은 황량하다. 그림 같은 사막? 그런 것 없다. 첫 장을 펼치자 말라버린 아랄해 바닥에 버려진 배 사진이 나온다. 한때 세계에서 네 번째로 컸던 내해(內海)는 어느새 크기가 절반 정도로 줄었다. 책 뒤표지 사진은 잔뜩 낡은 운동화다. 사진에서 글 성격이 드러난다.


키질쿰 사막에 발을 디딘 글쓴이는 예상대로(?) 고생을 한다. 쉴 곳은 없고, 20km 넘게 걸었는데도 그늘이라고는 경찰 검문소 그늘이 전부다. 걷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도 갈증이 느껴진다.

"드디어 도착한 버스정거장. 허리는 뻣뻣하게 굳었고 머리는 텅 비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계속 헛구역질이 난다. 이게 바로 탈진 직전의 증상일 것이다." (27쪽)

 꼬질꼬질 낡은 운동화. 러시아 바이칼 호수,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마다가스카르를 누빈 운동화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터진다.
꼬질꼬질 낡은 운동화. 러시아 바이칼 호수,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마다가스카르를 누빈 운동화는 마침내 우즈베키스탄에서 터진다.솔지미디어
오랫동안 사막을 걸은 후유증은 어느 정도일까. 오른발 뒤쪽 굳은살은 메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피가 배어나온다. 뒤꿈치엔 상처가 생겼고,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무엇보다 안면몰수증이 생겼다. 아무 집 평상에나 들어가 벌러덩 드러눕는다. 그러곤 곧장 잠을 자거나 주인에게 재워 달라 부탁한다.

글쓴이는 사막을 보기 위해 갔으나 가도 가도 끝없는 풍경에 마침내 분통을 터트린다.

"이놈의 얼간이 같은 사막은 도대체 언제 끝나나. 사막이 보고 싶어서 우즈벡 도보여행을 계획했건만, 이제는 이 사막 좀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마약 같은 사막의 더위가 머릿속까지 텅 비게 만든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136~137쪽)

글쓴이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신다. 맥주도 마시고 보드카도 마신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사람 사귀는 재주가 놀랍다. 도대체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과 어떻게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고 잠을 잔단 말인가. 현지 회화 책자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놀라울 뿐이다.

술을 마신 내용 중 압권은 1박2일로 벌인 술판. 글쓴이는 오후 6시경 술을 시작한 뒤 2차를 간다. 술은 맥주와 보드카. 새벽까지 마신 다음날 아침 8시경 눈을 뜨자마자 다시 술을 마신다. 점심 때 보드카로 2차를 한 뒤, 마친 시간은 오후 3시. 그러곤 뻗었단다.

술이 질릴 만도 한데 글쓴이에게 여행과 술은 한 몸이다. 고된 여행을 술의 힘으로 이겨낸 것인가. 아무래도 긴 머리카락의 힘으로 괴력을 발휘한 삼손처럼 글쓴이는 술로 괴력을 발휘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친절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덕분인 듯하다. 외국인, 특히 한국인에게 친절한 우즈베키스칸 사람들은 글쓴이에게 쉽게 방을 내주고 술과 밥을 대접한다. 대낮에 과일을 얻어먹은 것도 부지기수다. 아무래도 후한 인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우즈베키스탄이 신흥관광지로 떠오를 것 같다. 무엇보다 치안이 그렇게 훌륭하단다.

술 냄새 폴폴 풍기는 여행기지만 글쓴이가 나름대로 조사한 우즈베키스탄 이야기가 재밌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를 호령한 티무르제국과 몽골제국, 치과가 공짜이고 여자는 술을 못 마시게 하는 우즈베키스탄 문화 등 낯설지만 매력 있는 나라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국에서 6년을 일한 뒤 지역에서 부자로 떵떵거리며 사는 알리,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초청장을 원하는 사람 등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이들에게선 또 다른 한국을 엿보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온 동안 한국에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글쓴이는 털어놓았다. 롯데 자이언츠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최진실은 자살했다. 미국에서 시작한 금융위기 때문에 아이슬란드는 국가부도 위험에 처했고, 한국 경제는 휘청거렸다.

책을 다 읽고 글을 쓰는 지금 나도 많은 일을 겪고 있다. 전직 대통령과 택배노동자가 목숨을 끊었고, 화물연대는 총파업을 결의했다. 연예인 마약수사가 이뤄진 가운데, 가수 구준엽이 검찰 인권탄압 기자회견을 열었다.

키질쿰 사막은 지긋지긋하도록 조용하지만 이 땅은 시끄럽다. 글쓴이가 사막을 그리워하는 게 그 때문이 아닐까. 문득 사막이 그리워진다.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 실크로드 1200km 도보횡단기

김준희 글.사진,
솔지미디어, 2009


#우즈베키스탄 #키질쿰사막 #김준희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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