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밭일 마치고 고무신 탈탈 털어 세워놓다 놓다보면 풀꽃들과 마주치게 된다.
송성영
도시를 오가며 정신 놓고 밥벌이에 목을 맬 때는 녀석을 까마득히 잊곤 합니다. 하지만 설렁설렁 논밭일 하고 돌아올 무렵이면 녀석들과 만나게 됩니다. 개울물에 흙발 씻겨 고무신 탈탈 털어 주춧돌 옆댕이에 세워 놓다가 녀석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꽃이 피기 시작하고부터 한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녀석들은 미소를 거두지 않습니다. 어둠 속, 마루에 켜 놓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꽃을 피웁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미소를 내보입니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푼수처럼 녀석들 자랑을 늘어놓곤 합니다.
"이쁘쥬?" "신기하쥬?" "어디서 온 것일까유?"문득 처마 밑 그것도 물기 없는 주춧돌에서 녀석들은 뭘 먹고 살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단 한차례도 물을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께 물 한 번 준 적이 없었네요."최은숙 선생과 함께 서툰 낫질로 벼 벨 때도 도와주고 못자리 놓을 때도 일손 보탰던 김영희 선생이 그럽습니다.
"그냥 두는 게 좋겠네요. 물 주지 않아도 꽃 피운 이유가 있겠죠."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습니다. 녀석들은 그동안 단 한번도 목마르다며 물 좀 달라 애원한 적이 없습니다. 물 한 번 준 적이 없지만 잎이나 꽃이 말라 시들시들 앓거나 하질 않았습니다. 녀석은 어쩌다 바람 곁에 실려 온 물기만으로도 충분히 생명을 유지하고 변함없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살이들은 자신이 감당할 만큼의 생명력을 갖고 태어납니다. 주춧돌 틈새는 녀석들이 생명살이를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환경조건일 수 있습니다. 녀석들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녀석들은 적지도 많지도 않게 딱 만큼 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적거나 많거나 하는 개념은 사람의 손길 닿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주춧돌 틈새는 사람이 생각할 때 가장 '열악한 환경'이라 할 수 있겠지만 녀석들에게는 최상의 환경 조건일 수 있습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의 손길 없이 한 달 내내 싱싱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입증해 주고 있으니까요.
녀석들이 미소 짓고 살아가는 '주춧돌 환경'을 바꿔 놓는다면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고난이 찾아 올 것입니다. 물 한 모금 먹을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라 함부로 판단하여 물을 주게 되면 너무 과해 일찌감치 시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물고문이 되었거나 주춧돌 틈새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그 어떤 영양분이 쓸려나가 생명살이에 큰 부작용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생명체도 그러한데 하물며 대운하를 건설하려는 속종을 감추고 멀쩡한 강을 정비 하겠다니, 얼마나 정신나간 짓거리인가 싶습니다. 좀더 배불리 먹겠다는 것이겠지요. 산하를 깨뭉게 먹고 또 먹고, 얼마나 더 먹어야 만족할수 있을까요?
풀꽃들은 내게 이릅니다. 당신이 먹고 또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상 저들의 미친 짓거리는 계속될 것이다. 아귀같은 저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과의 싸움이다. 저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먼저 당신 자신부터 더 먹겠다는 아귀근성을 내려놓아라 이릅니다.
비록 손바닥만한 논밭이지만 흙을 만지다 보면 문득 문득 하루 세 끼 배 채우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이 넘쳐나는 이 풍족한 세상에서 하루 세끼 먹기가 뭐 그리 힘드냐 하겠지요.
하지만 하늘과 땅의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과연 하루 세끼 먹는 게 쉬운 일일까요? 하루 두 끼를 먹게 되면 배가 고픕니다. 힘이 듭니다. 하지만 하루 두 끼 먹는 날 보다는 세 끼 이상을 먹고 사는 날이 더 많습니다.
하루 세 끼를 먹고도 뭔가를 더 먹게 됩니다. 담배 피우고 술을 마시거나 뭔가 군것질을 하게 됩니다. 자연을 쥐어짜거나 훼손한 결과물로 그 뭔가를 섭취하게 됩니다. 좀 더 많이 먹는 만큼 동물이든 사람이든 누군가가 그 만큼 굶주리고 고통 받아야 하고 내 자신 또한 온전치 못합니다. 몸이든 정신이든 부대끼게 됩니다. 너와 나 모두가 고통의 바다에서 신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