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정세균 대표와 이강래 원내대표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나란히 참석하고 있다(자료 사진).
남소연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
닉슨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는 1968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해 11월 3일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다. 반대 개념은 시끄러운 소수(vocal minority)다.
닉슨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만들어낸 말, '침묵하는 다수'닉슨의 의도는 분명했다. 시위나 행동을 통해 시끄럽게 하면서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 소수라는 의미다. 다수 국민은 자신의 편이라는 메시지다. 분리·지배 원칙에 충실한 책략이다. 정교하게 기획된 정치적 간지(奸智)로 '편 가르기 프레임'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후 이 개념은 보수나 권력자가 애용하는 정치담론이 됐다.
2009년 6월 대한민국, 누군가 침묵하는 다수를 들먹이고 있다. 여권과 보수언론이다. 이들의 의도 역시 분명하다. 닉슨과 다르지 않다. 시민·사회단체와 연계해 광장으로 나간 민주당을 겁박하기 위한 것이다. "정치 굿판을 접고 이제는 국회로 복귀하라." 한나라당의 말이다. 실제로 효과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침묵하는 다수에 따르면 된다. 침묵하는 다수의 생각은 '침묵하는 다수'를 입에 달고 사는 그들과 전혀 딴판이다. 얼마나 다른지는 여론조사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여론조사가 일제히 말한다. '국민의 다수는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여권에게 쇄신을 요청하고 있다.'
한길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기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70.3%였다. 과감한 변화, 이것이 다수가 말하는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다.
못 미더우면 다른 것도 있다. 한나라당 쇄신특위가 의뢰한 조사다. 한국리서치가 했다. 청와대가 밀어붙이기 식의 국정운영을 한다는 의견에 공감하는 응답이 68.4%였다. 당정이 서민층보다는 부유층을 위한 정책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의견에 대해 70.2%가 공감했다. 당정의 인사가 편파적으로 이뤄져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66.3%였다. 이쯤 되면 삼척동자도 알 만하다. 잘못됐다, 이것이 다수가 말하는 눌함(訥喊)이다. 신음하듯 고통스럽게 외치고 있는, 소리 없는 함성이다.
그러나 여권은 마이동풍에 우이독경이다. 한때 동풍이 거세고, 독경소리 높았다. 허나 곧 잦아들었다. 호호탕탕하게 시작된 쇄신 논의는 우두망찰하게 끝난 듯하다. 드디어, 각설하고 힘으로 밀어붙일 태세다.
"국정기조 운영에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이지 국정기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선택은 하나뿐이다. 민주당은 당연히 광장으로 달려갔다. '광장 없이 민주 없다.'
민주당은 여전히 위기다얼마 전까지 민주당의 정당 지지율은 12~13% 정도였다. 그나마 호남에서 얻은 높은 지지율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서울에선 한 자릿수 지지율이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정국을 거치면서 30%대까지 치솟았다. 정치적으로 횡재한 셈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민주당의 위기는 자업자득이다. 지난 4월의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가 이를 말해준다. 민주당은 자신을 좋아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껏 정서적으로 가까워서, 혹은 지지할 만한 다른 정당이 없어서가 대부분이다. 전체의 65.7%다. 반면에 지지하지 않을 이유는 분명했다. 34.3%가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로 변화와 쇄신 노력을 하지 않는 점을 들었다. 13.4%가 인물부재를 거론했다.
정당 지지는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곧바로 옮겨가지 않는다. 대개 무당파로 빠지는 중간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무당파가 정당 지지를 오르내리게 하는 기본 동력이다. 그런데 무당파의 42.1%가 변화와 쇄신 노력 부재를 이유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심각하다. 허나 아직 끝이 아니다.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층의 40.5%가 같은 이유로 민주당을 외면했다. 이들이 바로 반(反)한나라당, 비(非)민주당 성향의 국민이다.
민주당이 추모 정국에서 지지율이 급상승한 것은 요행이었다. 우선 민주당이 상주를 자처했다. 게다가 민주당 외에 노 전 대통령과 연고를 맺은 정당이 없었다. 또 광범위한 '반(反)한나라당, 비(非)민주당' 중에서 상당수가 일시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반한' 때문에 '비민'을 잠시 덮어두었다. 당연하게도 서거 국면이 정리되면서 민주당의 지지도는 빠지고 있다. KSOI 조사에 의하면, 6월 1일 31.4%였던 민주당 지지율은 15일 23.8%로 떨어졌다.
민주당의 반짝 상승은 속빈 강정이다. 정치 세력으로나 인물의 측면에선 민주당이 전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유시민, 한명숙 등 대표적인 친노 인사들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 물었다. 48.4%가 기대감을 표시했다. KSOI 조사다. 차기 대권주자 지지도에서 유시민은 16.1%로 일약 2위를 기록했다. 1위 박근혜 전 대표는 30%였고, 3위 정동영 의원은 9.7%였다. 리얼미터 조사다. 유시민, 한명숙은 서울시장 가상대결에서 오세훈 현 시장을 압도했다. <중앙일보> 조사다.
민주당은 현재 안팎곱사의 처지다. 안으로는 인물이 없고, 밖으로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가려 있다. 민주당은 이른바 불임정당이란 오명을 씻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대권주자 부재의 상황은 여전하다. 어느 조사를 봐도 민주당 소속의 유의미한 대권주자는 없다. 심지어 그럴싸한 광역단체장 후보조차 드물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
밖으로, 대여 투쟁의 리더십을 DJ에게 빼앗기고 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를 지키고 서민경제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우리 모두 들고 일어나서 이 나라를 국민들이 안심하고 사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들자." 민주당은 DJ의 선도에 충실히 뒤따르는 듯하다. 그것의 옳고 그르냐를 떠나 덕분에 민주당의 존재감은 더 희미해지고 있다.
여전히 많은 인사나 세력이 민주당 밖에 있다. 유시민, 이해찬, 정동영, 강운태, 전갑길, 이석형 등이 그들이다. 이런 반목이 최악의 분열로 발전할 수도 있다. 예컨대, 친노 세력이 독자신당을 꾸리는 것이다. 혹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독자후보를 내는 것도 가능하다. 모두 민주당의 위기를 말해주는 사실들이다. 민주당이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다.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력 수단'민주당은 선거의 덫(the election trap)에 빠져 패배했다.' 미국 민주당이 2000년과 2004년 대선에서 진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보스턴대학 찰스 더버 교수에게서 나왔다.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력 수단이다.' 정당이론의 대부 샤츠슈나이더의 말이다. 이 땅의 민주당은 이 두 명제를 명심해야 한다.
당장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여기저기 영합하려는 눈치놀음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보수언론의 프레임과 담론공세에 저항해야 한다.
미디어리서치 조사(복수응답)에 의하면, 국민의 40.3%가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책임 주체로 언론을 꼽았다. 반대함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반대는 야당의 역할명제다. 청와대가 밀어붙이기 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견에 국민의 68.4%가 공감하고 있다. 한국리서치 조사결과다. 와전(瓦全)이 아니라 옥쇄(玉碎)가 필요한 때다.
국회를 여느냐, 안 여느냐는 쓸데없는 나눔이다. 장외투쟁인가, 원내투쟁인가 하는 것도 부질없는 구분이다. 관건은 민주당이 침묵하는 다수와 소통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맞아 죽어도 국민 곁에서 요지부동 버텨야 한다. <한국일보> 서화숙 대기자의 고언이 곧 정언이다. "민주와 반민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반대와 대안은 동전의 양면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안정책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당의 존재이유다. 그것으로 집권해야 한다. 루스벨트의 뉴딜(New Deal), 클린턴의 스몰딜(small deal)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그들은 정책으로 사회적 약자나 열패자, 즉 침묵하는 다수를 동원해 승리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꿨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가야 할 길은 자명해 보인다. 브나로드(v narod)! 포르테(forte)!!
덧붙이는 글 | 이철희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수석 애널리스트로서 여론 동향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서로 <1인자를 만든 2인자들>, <어드바이스 파트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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