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이 밝아온다.
실컷 잔 듯한데 일어나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다. 시계도 없었더라면 더 좋을 뻔 했다.
인공의 빛이 없는 터라 어젯밤 도시에서 보다 일찍 잠을 자긴 했다. 너무 이른 시간 같아 조금 더 누워있었다. 조금 더 노곤하게 몸을 쉰 후 고양이 세수를 하고 이슬사진을 담을 겸 밖에 나갔다. 바람이 분 탓에 어제만큼 이슬이 맺히지는 않았지만 쇠뜨기의 일액현상은 여전해서 쇠뜨기마다 이슬천지다. 여전히 이슬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침이다.
쇠뜨기는 마디가 있어 뚝뚝 잘 끊어진다.
밭에 이놈들이 자라기 시작하면 부지런히 뽑아줘야 한다. 쇠뜨기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지 뿌리째 뽑기도 어렵거니와 마디까지 뚝뚝 부러져, 김을 매고 지나간 자리는 보기만 좋을 뿐, 다음 날이면 또 순을 올리는 끈질긴 놈이다. 뚞뚝 끊어지는 마디, 쇠뜨기에는 연약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라. 그렇게 연약한 구석이 있어 너는 태고의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도 연약한 부분이 있고, 지지리도 못난 것 같아 버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너무 강해서 가지만 꺾여도 될 것을 뿌리째 드러내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때론 비굴하게 보일지라도 '삶'이라는 큰 맥락에서 보면 가지가 꺾이고 상해도, 이파리가 벌레 먹고 상처를 입을 지라도 뿌리를 내리고 여전히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느림>
잔디밭에도 쇠뜨기와 왕씀배 등등 잡초가 무성하다.
이슬사진을 담은 후, 하늘이 흐려 밭일하기가 좋은 날이기에 잔디밭에 침입한 잡초를 뽑아내기로 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그러나 여기는 너희가 발붙일 곳이 아니다.'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배가 고프다.
도시에서의 일상처럼 그냥 아침을 거르면 점심을 먹는 것으로 족하리라 생각했는데 배가 고프다.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자 생각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이런, 겨우 8시 45분이다.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는데 여느 때 같으면 사무실에 도착해서 컴퓨터 켜고, 커피 한 잔 하며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물론 출근 전 한 일이라고는 가까스로 일어나 조간신문 헤드라인 기사보고, 먹는둥마는둥 서너 숟가락 아침 먹고, 막히는 도로를 뚫고 한 시간여 씨름한 끝에 사무실에 도착한 시간이 아닌가!
아이러니다.
온갖 편리시설과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 온갖 교통수단이 다 완비되어있는 도시생활이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느려터지다니!
<무색해진 거룩한 밥상과 빨래>
오늘 아침도 거룩한 밥상, '밥과 김'을 놓고 식탁을 대했다.
가공된 김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물골에 들어온 이후 채소와 막된장만으로 반찬을 삼았더니만 조미료로 맛을 낸 김의 짠맛이 입안을 얼얼하게 한다. 조미료에 들어있을 화학성분을 생각하니 거룩한 밥상이 조금은 무색해 졌다.
아침을 먹고 이슬에 젖은 옷가지와 신발을 빨았다.
그냥 습관적으로 벗어놓고, 으레 빨래는 아내에게 맡기고, 출근할 때 다림질되어 있지 않으면 아내를 타박하던 나를 반성했다. 밭에서 김을 매다보니 손톱에 때가 시커멓게 끼고, 손가락에 풀물이 시퍼렇게 들었었는데 손빨래 20여 분 만에 손톱의 때뿐만 아니라 손가락 마디의 풀 때까지 말끔하게 되었다.
세탁기로 여성의 삶이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물의 낭비와 세제사용을 생각해 보면 편리를 위해 너무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 같다. 여성들만 빨래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도 빨래에 동참한다면 굳이 세탁기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 무서운 생각이란 '중국이나 인도사람들 모두가 현대화된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어 집집마다 세탁기와 양변기를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하는 상상이었다.
곤충의 눈을 확대시켜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나도 꼭 한번 담아보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초접사로 사진을 찍으려면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야 하는데 살아있는 곤충인지라 움직임이 많고, 가만히 있은들 렌즈를 들이대면 기겁을 하고 날아가 버리니 그들의 눈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 많은 사진들이 혹시 죽여서, 고정시켜놓고 찍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아니면 새벽에 이슬의 무게 때문이 날아가지 못한 것을 담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곤충의 눈 찍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창문을 열다보니 말벌 한 마리가 죽어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찍었는데 역시 죽은 놈이라 그런지 눈빛이 선명하질 않다. 검정볼기쉬파리라는 제법 큰 놈이 한 마리 들어왔다. 동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마침 곤충이 필요한 터라 파리채로 실신(?)을 시켰다. 말벌보다 조금은 낫지만, 그 역시도 생각대로 담기질 않는다. 아무튼 곤충의 신비스러운 눈을 척척 담아내는 분들이 존경스럽다. 내일 이야기지만 다음 날 아침, 잔디밭에서 살아있는 곤충 눈을 찍는데 성공했다.
다른 반찬 없이 라면과 밥 반공기로 점심을 먹었다. 인스턴트식품인 라면, 쇠고기라면을 먹었으니 쇠고기분말이라도 들어있는 것이겠고, 기름기가 있어 설거지를 하는데 물이 더 필요하다. 그래도 세제를 사용할 정도는 아니다. 밀가루가 있어 수세미에 조금 묻혀서 설거지를 하니 라면국물이 묻은 그릇도 뽀드득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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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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