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농사꾼 홍순조, 장금순 부부가 뙤약볕 아래 옥수수 씨앗을 심고 있다.
박도
땀내나는 밀짚모자와 수건
참 사람이란 간사한가 보다. 40년 넘게 산 서울이 이제는 점차 낯설어지고 하룻밤 자기도 싫어진다. 엊그제 건강검진으로 아침 일찍 빈속으로 와 채혈을 하라는 병원의 지시로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이 사는 서울 집에 가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채혈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자니 또 하룻밤을 자야기에 그게 싫어 채혈을 한 뒤 곧장 안흥으로 내려왔다. 다음날 안흥에서 곧장 병원으로 갈 셈이었다. 아이들 사는 집이 후덥지근하기도 하거니와 이웃의 소음과 불빛으로 잠을 설치다시피 하룻밤을 보냈다.
시외버스는 어찌나 세게 달렸는지 서울을 떠난 지 두 시간 만에 안흥장터 마을에 닿았다. 마침 서울 한 출판사에서 두어 권 책을 얻어 가방도 무겁기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살폈으나 장터에서 영업하는 세 대 모두가 보이지 않았다. 뙤약볕아래 무거운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동네 '말무더미' 마을 어귀에서 낯익은 홍순조(73) 어른 내외가 아주 다정하게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제 배추를 뽑더니 그 자리에다가 뭘 심는 모양이었다. 내외가 뙤약볕을 가리고자 바깥어른은 밀짚모자에, 안어른은 챙이 긴 모자에 수건을 덮고는 나란히 밭두둑에 씨앗을 심는 모습이 여간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의 어떤 황제가 민정시찰을 가다가 방앗간에서 먼지 묻은 머릿수건을 뒤집어 쓴 부부를 보고 "그대들의 먼지 묻은 머릿수건이 내 왕관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다는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수고 많으십니다.""어디를 다녀오시오?" "서울에요." "두 분 일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습니다.""좋게 봐 줘서 고맙소.""수고하세요.""잘 가시오."마음속으로는 보따리를 여러 번을 쌌지만 집에 돌아오자 카사(고양이)란 놈이 나들이 문 계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그에게 간식으로 우유 한 잔을 챙겨주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카메라를 메고 다시 홍씨네 밭으로 갔다. 마침 내외분은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배추를 제 값에 팔았는지 그게 궁금했다. 올 봄에는 배추 값이 다락같이 올랐다고 법석이었는데, 고랭지 배추농사 전문 농사꾼 앞집 노진용 씨의 말을 들으니 여름배추가 출하되는 이즈음에는 값이 폭락했다고 한다.
"배추는 제 값을 받고 넘겼나요?""한 매끼(단위; 한 트럭 분)에 80만원에 넘겼어요.""그래도 제 값은 받으셨네요.""계약재배를 했기 때문이지요."
농협과 계약재배를 하면 크게 이익은 남길 수 없지만 다소 이윤은 남길 수 있나 보다. 배추 뽑은 그 자리에다 파종을 한 게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