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실을 말하는가, 사실을 말하는가

이언 피어스의 <핑거포스트> , 길을 묻다

등록 2009.07.08 09:51수정 2009.07.08 09:51
0
원고료로 응원
책을 빌린 건 정확히 2005년 겨울이던가. 이틀이면 다 읽겠네라고 했던 말이 화근이었는지, 3년 동안 책에 먼지만 쌓인채 읽어야지 하는 압박을 견뎌야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단숨에 읽어버렸다. 진작 읽을 걸. 역시 책이란 건 초반의 지루함을 견뎌내면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초반부터 달짝지근하게 읽히기 시작하면 마지막 장을 덮고서는 텃텃함 밖에 남지 않는다.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에 개입되는 네 명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시선으로 사건을 설명한다. 진실에는 편견이 작용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각기 다른 인물을 통해 바라보는 사건은 착각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베이컨의 4대 우상이다. 우상이란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권위의 상징으로, 베이컨은 철학을 하기 위해서 마음의 우상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의 그릇된 사용으로 인해 생긴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인해 생긴다. 극장의 우상은 전통적인 권위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데서 생긴다, 종족의 우상은 자신의 편견을 세상 전부에 투사하여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인류 공통 우상이다.

마르코 다 콜라도, 잭 프레스콧도, 존 윌리스도, 앤소니 우드도 자신들의 우상에 사로잡혀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묘하게 위장된 서술과 뉘앙스는 사건의 진실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우리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개인적인 사설 없이 객관적인 진실만 이야기할 수 있는가? 내게 욕을 한 친구에 대해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왜인가? 나는 그 친구에게 피해를 당했고, 너도 그 친구를 나쁘게 생각해줘라는 사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그 친구에게 큰 잘못을 했던 것은 교묘히 빠뜨리고 이야기한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만 말했다. 하지만 진실을 말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핑거포스트는 진실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뜻한다고 한다. 앤소니 우드는 마지막으로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며 자신이 핑거포스트임을 자처한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이 진실이라 생각한 것이 편견에서 오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책을 다 읽었지만, 누가 정말 살인범이고 왜 죽였는지에 대해 깨끗이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드의 말을 믿는 순간 나도 우상에 사로잡혀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을 말하는가? 진실을 말하는가? 그럴듯한 진실을 꾸며대는 거짓말쟁이는 아니런가?

핑거포스트, 1663 - 보급판 세트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서해문집, 2005


#핑거포스트 #우상 #베이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2. 2 한동훈 표정 묻자 "해가 져서...", 이어진 기자들의 탄성 한동훈 표정 묻자 "해가 져서...", 이어진 기자들의 탄성
  3. 3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4. 4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5. 5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