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지역 대학교수원에 위치해 있다. 여기도 신축되기 전에는 출석수업을 받으러 다녔었는데 신축한 곳으로 이전하고서는 딱 한 차례 가봤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나는 경기지역대학 소속이었지만 거리가 멀어서 평상시에는 보통 성.광.하 학습관을 주로 이용했다. 그러니까 내 정신적인 모교는 혜화동 본교나 경기 지역대학이 아닌 겨울이면 차단기가 작동되는 성.광.하 학습관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몇 년 전 분당 미금역에 신축 학습관이 생기면서 사라져 버렸다.
방송 대학생이 된다면 이십대 초반의 풋풋한 새내기들처럼 두툼한 원서를 끼고 드넓은 잔디밭 교정을 거닐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는 곳이 혜화동 본교가 아니라면 교수님을 직접 만날 기회도 없을 것이다. 도서관이나 학습관의 딱딱한 책상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두툼한 책과 더불어 재미있지도 않은 강사의 눌변에 눈은 천근만근이 될지도 모른다. 나도 졸업하기 전 교수님을 직접 본 것은 4학년 때 전국의 영문과 학생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 때뿐이었다. 하지만 각 지역대학교나 시군 학습관은 자체적으로 학생회가 조직이 되어 있어서 과별로 스터디 모임이 잘 꾸려져 있다.
학생 수가 많다보니 중간고사나 기말시험기간이 되면 각 지역대학교에서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이 벌어진다. 학생들이 시험장소를 잘 못 알고 오는 경우는 다반사고 학년별로 시험일정이 달라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도 허다하다. 결국 시험을 보지 못하고 울상을 짓는 학생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나도 한번은 1학년 과목을 4학년 시험 치는 날짜에 간적이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권총(F)을 맞았다. 덕분에 모자라는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 방송대에서의 4학년 마지막 겨울방학의 열정을 계절수업으로 불태워야 했다.
-입학은 쉬워도 졸업하기는 힘든 학교! 맞을까?맞다. 원서를 낼 당시 내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최하위권이었다. 무시험 전형에 내신 70퍼센트 합격 할 수 있을까? 당시 영문학과 입학 경쟁률은 1.2대1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나는 방송대학교 영문학과에 학생이 되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날 방송대 영문학과를 4년 만에 졸업 해버리기로 결심했다. 얼마 안가서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방송대를 졸업한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방송대 이전의 모든 인간관계도 파탄(?)이 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만큼 지독하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방송대는 졸업하기 힘들다. 과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4년 만에 졸업하기는 더욱 힘들다. 특히 외국어를 다루는 인문계열은 더하다. 함께 입학했던 백오십 여명의 동기중 4학년까지 살아남은 입학생은 나를 포함 십여 명 정도였다.
육아, 직장생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험 성적을 인정사정없는 컴퓨터가 채점하는 것도 이유중 하나다. 재학생 수만 이십만이 넘는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규모다. 그 많은 학생의 시험지를 사람이 일일이 채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정 있어서 시험을 보지 못했다고 재시험 꿈도 꾸지 마시라. 더구나 일곱 과목의 전 범위를 단 하루에 봐야 하는 기말 시험은 지금 생각해도 진땀이 난다.
-성.광.하 학습관 영문학과 대표를 맡다.파우스트, 세익스피어, 제임스 조이스, 유진 오닐, 소포클레스, 켈트족과 앵글로 색슨족의 흥망사가 기록된 고대 영어를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외워야 했던 나는 4학년이 되면서 졸지에 성.광.하 학습관의 영문학과 대표를 맡아 버렸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전임대표가 2학기가 시작될 무렵 띠 동갑의 아름다운 신입생과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4학년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죄(?)로 인해 1학년 후배들의 남은 스터디 일정과 일련의 과행사를 주도해야 했고 임시총회와 총회를 거쳐서 대표가 되었다. 대표가 되고 난 이후의 과정은 험난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값진 경험이었다.
-방송대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일까?아니다. 방송대학교의 일 년 학사력을 보면 어느 대학교 못지않게 빠듯하다. 3월초 오리엔테이션부터 시작해서 4월초 과별 엠티, 주점, 체육대회, 중간고사, 출석수업, 출석대체시험, 그리고 기말시험까지 다양하다. 각 지역대학별로 열리는 축제도 다양하다. 때문에 처음 입학하고 일 년 동안은 방송대학교에서의 학습방법과 학사 일정을 익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대학교를 졸업 하던 날방송대학교의 졸업식은 주로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다. 졸업식 또한 웅장하다. 전국에서 모인 졸업생만 만 명 가까이 되니 올림픽 공원은 마치 국제 행사라도 열린 것 같았다. 게다가 각 지역대학교에서 열리는 졸업식도 많다. 그날은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와서 졸업생들에게 축사를 해주셨다. 물론 그날 올림픽 공원을 누비던 수많은 졸업생들 속에 나도 서 있었다.
수줍음이 많아서 생일도 변변히 챙기지 않던 나는 그날만큼은 사람들에게 가장 열렬한 축하를 받고 싶었다. 졸업식을 며칠 남겨두고서는 일일이 후배들에게 전화를 해서 하늘같은 선배님 졸업식에 얼굴 내밀지 않으면 가만 안두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과대표 프리미엄을 앉고 이십대 후반의 선배부터 오십대 후반의 후배가 안겨주던 스무개가 넘는 꽃다발. 오십이 넘은 후배가 직접 만들어온 꽃다발은 아직도 내 방 한켠에 소중히 꽂혀 있다.
방송대학교를 졸업한지 5년이 지났다. 누군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방송대에서의 4년을 꼽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싯구처럼 인생은 내게 떡 하나 던져 주지 않았다. 성인이 되었지만 역시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대학교에서의 4년은 세상을 바로 보게 할 시각을 주었다.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벗들도 주었다. 무엇보다 내 인생을 걸고 이뤄나갈 꿈 하나를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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