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사라졌다... 대학강의 배정의 실상

등록 2009.07.28 11:26수정 2009.07.2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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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전화 한 통에 한 학기 목숨줄이 걸린 나는 비정규교수이다. 이른바 '시간강사'. 대학들은 '세계 100대 대학'이니, '글로벌 대학'이니 요란스레 떠들고, 학교 입구에는 마천루를 지어올리고. 그래도 '삽질'만으로 안 된다는 인식 정도는 있어, 교수들의 연구 실적에도 꽤 신경을 쓴다. 그래서 교수들의 연구실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SCI급 학술지에 논문 한 편만 게재하면 성과금으로 1억을 준다. 그런 굉장한 대학에서 나는 '시간당 임금'을 받는 '한갓 시간강사'이다.

비정규교수로서 나는 어처구니없는 강의배정에 개인적 분노와 대학교육에 절망을 느껴 내 문제를 사례로 대학교육의 실상을 고발하려고 한다. 강의배정 문제는 나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대학에 만연한 비리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본분은 연구와 교육이지만, 대학들은 정작 교육에 소홀할 때가 많다. 대학강의 배정 실상을 보면, 대학교육이 보인다. 모든 대학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많은 대학, 많은 학과에서는 강의배정이 매우 무원칙하고 뻔뻔스럽게 진행된다. 강의배정에 대학교육의 질도, 강의수강자 학생들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지 않다.

2009년 2학기 강의배정 시기, 전화 한 통이 오기를 내내 기다렸다. 전화가 오지 않으면 강의는 없는 것이고, 전화가 오면 산다. 이번 학기 나는 운이 좋았는지, 6월 말 즈음에 전공과목 1강좌와 교직과목 1강좌를 맡을 수 있냐는 전화가 왔다. 그러마라고 대답했고, 강의배정이 있은 한 달 뒤, 학과에서 강의계획서 입력마감시한을 문자로 알려왔다. 한 달 동안 다음 학기에 배정받은 강의를 구상했다. 지난 강의에서 문제가 있었던 내용은 바꾸고, 또 내가 약한 강의 내용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선생을 초청하기로 미리 약속도 해두었다.

강의계획서를 입력하려고 학교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이런, 강의가 사라져 버렸다. 입력할 과목의 강의가 내게 없는 게 아닌가. 황당한 노릇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학과사무실에 알아보니, '시간강사'들이 전공과목 강의를 너무 많이 해서 정규직 교수가 강의를 맡았다고 알려준다. 강의변경이 있으면 미리 알려줘야 할 것 아니냐, 왜 알려주지 않았냐, 그리고 '시간강사'들이 전공과목 강의를 너무 많이 해서 문제라면, 왜 다른 '시간강사'들은 그대로 전공과목을 강의하면서 나는 할 수가 없느냐,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항변을 하였다. 학과에서는 마땅한 답변이 없다. 그냥 그렇단다.

강의는 대학교육의 거의 전부이다. 그런데도 대학교육을 측정할 기준은 학생들의 강의평가밖에 없다보니 대학들은 강의를 교수들 마음대로 배정한다. 강의가 어떤 기준에 의해 배정되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강의한 지 십 년이 다 되었지만, 강의배정 원칙을 늘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원칙이 있다면야, 정규직 교수의 눈에 얼마나 들었냐 정도이다.

학위논문 표절시비에 휩싸인 사람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학위를 받자마자 대학원 강의를 주고, 대학교수의 법적 수업적정시간이 9시간인데도 중등학교 교사에게 7-8시간 강의를 선뜻 내준다. 중등학교 교사로 학교수업 다 하고, 대학에서도 그 정도 강의하려면 강의의 질이 어떨지 염려하지 않는다. 그래 놓고도 대학들은 뻔뻔하게 대학교육의 질을 논한다. 그 대학을 나오면 우수한 실력을 갖출 수 있는 양 떠들어댄다. 대학교육의 질을 논하고 싶다면, 대학의 본분인 교육이 과연 어떻게 제공되는지부터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먼저 비정규직을 최소화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둔대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모대학 모학과에서는 비정규교수들이 담당해야 할 강의과목을 두고, 서로 합의된 원칙에 따라 강의를 배정한다. 어떤 대학은 강의개설권을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없이 개방하여 학생들에게 강의선택권을 넓혀준다. 강의담당 인력풀제를 도입하는 대학도 있다. 모 학과는 연구논문과 경력을 기준으로 강의담당자를 선정하기도 한다.


이런 방법들을 도입하지 않는 건, 현재 강의배정의 절대 권력자인 정규직 교수들이 비정규교수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대학생들과 학부모, 사회를 속이는 행위이다. 비정규교수들이 정규직 교수방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도록 하고선, 문지방을 넘지 않은 비정규직에겐 확실히 보복조치를 하고선, 학생들에겐 학문을 말하며 우아를 떠는 뻔뻔스러운 행위이다.

정규직 교수에겐 당장 달콤한 열매가 돌아갈지 몰라도, 거래에 의한 강의배정의 직접 피해는 수백만 원 등록금을 내는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대학교육이 썩으면 마침내는 자기 발밑도 썩어 들어간다는 사실을 정규직 교수들은 깨달아야 한다. 학생교육을 우선 가치로 두는 강의배정을 위해서는 강의개설권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에게 개방하고, 원칙에 따라 강의를 배정해야 한다.
#비정규교수 #대학강의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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