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앞에 있는 조정래길 표지석순천시는 지난 2005년 4월 30일, 승주 죽림에서 낙안 구기까지의 857번 국도 20여 킬로미터를 조정래길로 명명했다
서정일
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씨의 이름을 딴 '조정래길'이 순천시에 있고 그 길을 알리는 표지석이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입구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순천시는 지난 2005년 4월 30일, 857번 국도 승주 죽림에서 낙안 구기까지의 약 2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조정래 길이라 명명했다. 이는 살아있는 사람 이름으로 길 하나를 내 준 사례가 전무하던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파격적인 일이었다.
해금된 이후 모셔가기 열풍이 몰고 온 '조정래 길'지난 1988년, 분단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 태백산맥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진통을 시작했다. 하지만 태어난 기쁨도 잠시, 곧바로 이적성 논란, 국가보안법 위반에 휘말리게 되고 '혐의 없음',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린 지난 2005년 3월 31일까지 꼬박 11년 동안 주민등록부에 올리지도 못하는 설움을 겪었다.
수백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반대하는 측이나 기회주의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메뉴가 돼 '빨갱이 책이다', '인정받지 못한 책이다', '완전히 날조했다'는 등 비난의 목소리는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혐의 없음, 공소권 없음으로 주민등록부에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올리게 되자 상황이 돌변했다. 조정래씨가 벌교를 찾아 강연을 하던 지난 2005년 4월 9일 벌교초등학교 강당에는 그동안 곧게 자란 대나무나 해를 쫓아다니던 해바라기를 비롯, 지구상 모든 종류의 꽃과 나무와 나비들이 찾아들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정도였다.
순천시도 발 빠르게 20여일 후, 국도 857번 도로 20여 킬로미터의 구간을 '조정래길'로 명명했다. 보성군에서도 5월부터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을 착공한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내 자식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해금 이후, 소설 태백산맥과 조정래씨에게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 어찌 보면 이 지역에서는 불행의 시작이 된 것이다.
순천시와 보성군, 조정래를 반으로 나눠
▲지난 2005년 4월 30일 세운 조정래길 표지석지난 2005년은 소설 태백산맥과 조정래씨가 국가보안법으로 부터 해금되던 해로 조정래씨가 순천시 선암사 출생이라는 점에 주목해 발 빠르게 조정래길을 만들었다
서정일
소설가 조정래를 떠올릴 때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가 벌교이고 그의 문학관까지 설립돼 있는 것으로 미뤄 벌교가 조정래씨의 고향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벌교읍 회정리에 푯말을 붙이고 보존해 놓은 조정래씨의 생가(어린 시절 살았다는 집)를 보고 의심 없이 조정래씨의 고향은 벌교라고 믿는다.
하지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 고향은 선암사다, 즉 순천시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1943년 선암사의 부 주지였고 시조시인인 조종현씨의 차남으로 선암사(순천시)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인근 벌교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정래씨가 어디에 더 많은 정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순천시와 보성군의 피가 섞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적성 논란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등 복잡스런 것에 휘말려 있을 때는 나몰라라 했던 부모들이, 해금된 이후 대한민국에서 소설 태백산맥과 조정래를 모른 사람이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되고 나니 우리의 자식이 아닌 무조건 내 자식이라고 들고 나온 것.
조정래씨는 순천시나 보성군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식'
▲조정래길에 있는 집 대문앞에는 모두 조정래길 푯말이 붙어있다동네별 주소가 거리 명칭으로 바뀌면서 조정래길 내에 있는 모든 집들은 조정래길 푯말이 붙어있다
서정일
소설가 조정래씨는 순천의 자식일까? 보성의 자식일까? 결론적으로는 솔로몬 앞에서 반으로 나눈 것에 동의한 순천시나 보성군이나 모두 조정래씨의 진정한 부모는 아님이 확실하다. 아무리 조정래씨가 순천시 선암사에서 태어나고 보성군 벌교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조정래씨는 대한민국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돌이켜 해금되던 지난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국·내외적으로 조정래 브랜드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획일화된 시각이 만연했던 사람들의 사고를 다양성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돌려놓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역에서도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됐던 시기였다.
관광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순천시 선암사-낙안읍성-보성군 벌교-보성차밭을 이어 내려가는 조정래 루트를 충분히 살려야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분단된 현실처럼 조정래를 반으로 나눠놓아 지역 내에서도 "이곳이 왜 조정래 길이냐"는 등 잡음이 끊임없다. 분단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이 갈등의 원인은 조정래를 반으로 나눈 순천시와 보성군에 있다.
현재, 순천시에서 내 놓은 관광 홍보자료에 벌교와 태백산맥 문학관은 없다. 물론 보성군에서 발행하는 홍보책자에도 순천시 낙안읍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분단된 대한민국의 현실이 억울해 써 놓은 소설 <태백산맥>이건만 조정래씨를 나누고, 101년 전 분단된 작은 낙안군 조차 봉합하지 못한 것은 모셔가기 열풍 속에서 '내 자식 경쟁'에 나선 지자체의 낮은 역사의식과 욕심에 있다고 혀를 차는 지역민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 분산, 침략거점 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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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반으로 나눈 순천-보성... 이젠 합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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