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에 빼앗긴 교통약자 이동권

천안시, 경관보도육교 설치 추진... 교통약자 반발

등록 2009.08.14 17:46수정 2009.08.1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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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장애1급인 김영권씨(32, 천안시 쌍용동). 외출을 위해서는 전동휠체어가 필수인 김씨는 요즘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천안시가 월봉중학교 인근 사거리에 설치 계획을 발표한 '불당보도육교' 탓이다.

"주변에 약속이나 모임이 있을 때 종종 그쪽을 지나쳐요. 지금은 횡단보도가 있어 갈 수 있지만 육교가 생기면 그때부터 접근 금지 지대가 됩니다. 육교에 엘리베이터도 없다고 들었어요. 경사로는 완만해도 기울기 때문에 이용이 어렵습니다."

김영권씨는 "횡단보도를 없애고 구태여 수십억원을 들여 왜 육교를 설치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교통약자권리 해치는 60억원 경관육교 신설

 60억원의 예산으로 설치 예정인 불당보도육교의 모습.
60억원의 예산으로 설치 예정인 불당보도육교의 모습. 윤평호

천안시는 지난달 불당대로 월봉중학교 부근 사거리에 '불당보도육교'를 설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폭 4.5m, 총 연장 206m의 불당보도육교는 인근 사거리를 모두 연결해 설치하는 원형육교로 만들어진다. 천안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형태이다.

총 사업비 30억원으로 천안시가 발주해 이달 완공 예정인 천안의 또 다른 경관보도육교인 '천안삼거리교'에는 교통약자 이동편의증진시설로 경사로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설치된다.

반면 불당보도육교에는 장애인과 노인, 임산부, 어린이 등 교통약자들을 위한 이동편의시설로 경사로가 전부이다. 불당보도육교에는 사거리와 연결되는 육교 4개 지점에 각각 경사로가 설치된다. 4곳 경사로의 총 길이는 259m로 육교의 총 연장을 상회한다.


지난해 불당보도육교 신설을 계획한 천안시는 올해 기본 및 실시설계까지 마쳤다. 총 사업비는 60억원. 천안시와 대한주택공사가 절반씩 부담한다. 시는 연말까지 불당보도육교 설치를 완료한다는 계획. 시공사 선정 뒤 지난달 28일은 착공계도 제출했다.

경관보도육교 신설 계획이 알려지자 장애인단체들은 곧장 반발하고 나섰다.


가장 먼저 문제제기를 한 곳은 충청남도장애인단체연합회(충장연). 지난 달 23일 성명에서 충장연은 "교통약자를 고려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없는 육교를 설치하는 것에 충청남도 장애인계는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충장연은 부득이하게 육교를 설치할 수밖에 없는 도로의 경우 육교에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화를 요구했다.

지난 4일은 천안지역 8개 장애인단체로 구성된 천안시장애인단체협의회가 성명서를 발표했다. 장애인단체협의회는 불당보도육교 설치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라며 충장연보다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장애인단체협의회는 "불당보도육교 설치 계획을 당장 철회하고, 보행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보도와 횡단보도의 높이를 같게 한 '험프형 횡단보도'를 설치하라"고 밝혔다. 차량의 원활한 소통이 문제가 된다면 보행육교가 아니라 차량을 위한 고가도로와 지하도를 설치하라고 주장했다.

천안시장애인단체협의회는 17일 성무용 시장과 면담 뒤 상황에 변화가 없으면 오는 19일 불당보도육교 설치 장소에서 항의집회도 준비하고 있다.

낡은 육교들 철거해 교통약자 권리 회복해야
 설치된 지 28년이 된 신안육교의 모습.
설치된 지 28년이 된 신안육교의 모습. 윤평호

17일 시장 면담에서 천안시가 얼마나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을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시 입장은 '장애인단체 요구 수용 불가'이다.

장애인단체들의 요구에 천안시 건설사업소 개발과는 "(불당보도육교의) 승강방식을 엘리베이터로 할 경우 안전사고의 우려와 자전거도로와 연계하기 위해서는 승강기보다는 경사로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때 적합"하다고 지난 3일 회신했다. 불당보도육교 설치공사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 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교통약자권리와 충돌하는 불당보도육교 설치 논란을 계기로 천안시가 육교 중심의 그간 정책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공사중이거나 계획중인 천안삼거리교와 불당보도육교를 제외하고 8월 현재 천안에는 총 17개소의 육교가 있다. 3개소는 설치된 지 20년이 넘었다. 15년이 경과한 육교도 7개소에 이른다.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모두 갖춘 육교는 동서인도교 1개소. 4개소는 경사로, 1개소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일봉육교와 충무육교는 경사로가 구비됐지만 경사도가 가팔라 장애인의 이용은 사실상 어렵다.

심상진 천안시장애인단체협의회 대표는 "편의시설이 아예 없거나 형식적인 육교는 장애인들은 물론 임산부나 노인 등 교통약자들에게 이용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시설"이라고 말했다. 심 대표는 "시민들의 돈으로 만든 공공시설에서 특정인들을 배제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육교를 철거하는 자치단체도 있다. 부산광역시는 신축한 지 최소 15년이 지난 육교를 올해에만 8월까지 22개소 철거했다. 육교 철거 뒤에는 횡단보도 복원, 신호등 설치 및 보도정비사업이 시행됐다.

육교 1개소당 철거와 정비로 소요되는 경비는 7000~8000만원. 부산시는 육교 철거로 시민들 왕래가 편해지면서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는 효과도 발생한다고 전했다. 육교를 철거한다고 부산시가 신규로 육교를 설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안시와 다른 점은 있다.

부산시 생활교통팀 진홍근 담당자는 "꼭 필요한 곳에는 육교를 설치하지만 경사로 없이 모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고 말했다. 진 담당자는 "경사로 설치시 보도의 훼손도 많고 육교의 길이보다 경사로 길이가 더 길어져 교통약자들의 이용 외면을 초래한다"고 밝혔다.

김우수 천안YMCA 시민사업팀장은 "천안시도 오래 되고 낡은 육교는 철거해 횡단보도를 복원하는 것이 맞다"며 "경관을 앞세워 교통약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시대에 뒤처진 행정"이라고 말했다.

천안시에 산재한 육교의 정비와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천안시 2개 구청의 담당 부서는 '육교의 철거 계획은 없다'고 전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천안 지역 주간신문인 천안신문 538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천안 지역 주간신문인 천안신문 538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천안시경관육교 #교통약자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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