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2차 범국민추모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해 부근 한국관광공사앞에서 개최된 가운데, 고 이상림씨의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권우성
'서울구치소 수번 29' 이충연. 그는 용산 참사의 비극 한가운데 서 있다.
그의 아버지 고 이상림씨는 참사 당일(1월 20일) 남일당에서 불길 속에 생을 마쳤고, 철거민대책위원장이었던 자신은 망루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28일 입원 중에 체포돼 아버지 영정에 제대로 절도 못하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 수사대로라면 그는 건물에 불을 질러 아버지를 태워 죽인 셈이다.
이충연 위원장은 "참사 당일 경찰특공대에게 우리들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었다, 체제 전복을 노리는 빨갱이였고 죽여도 상관없는 테러리스트였다"면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아버지는 망루 4층에 함께 있었습니다. 새벽녘이라 어두웠고 최루탄 연기가 올라와서 앞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불길이 터지듯 치솟아 올라와서 몸에 불이 붙은 듯해서 얼굴을 감싸고 뒤돌아 창문으로 뛰어내렸고 얼마 전까지 아버지는 계단 입구 쪽에 계신 것까지는 봤습니다.저는 (남일당 건물 바로 뒤에 있는) 저희 가게 쪽으로 떨어져 옥상 벽과 망루와의 간격이 1m 정도 벌어진 틈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그쪽으론 떨어진 동지들이 없더라구요. 망루 안에 불길이 치솟아서 모두들 밖으로 뛰어내렸을 거라 생각했습니다."참사 당일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이틀 뒤 일반병실에서 뉴스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이 위원장은 아직 충격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당시 "아버지가 죽긴 왜 죽냐, 다시 한번 찾아봐라"며 통곡했던 막내아들은 지금도 "망루에서 떨어지기 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신 열사 분들을 살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구치소에 갇혀 TV를 통해 가족과 이웃들이 연행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이충연 위원장은 "그런 뉴스를 접하면 잠을 이루기 힘들다, 상복을 입고 슬피 우는 어머니와 아내 곁에 있어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면서 "특히 조중동을 비롯한 대다수 언론에서 왜곡보도를 하고 있어서 너무 힘들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이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철거민 유죄 경찰 무죄'라는 짜맞추기 수사를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용역업체 직원과 경찰의 합동 진압을 경찰이 부인하자 이에 대해 수사조차 하지 않다가, PD수첩이 공동 진압장면을 보여주자 어쩔 수 없이 수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법원 요청에도 검찰은 용역 사무실 압수수색 내용과 경찰 지휘부 조사 내용이 담긴 수사기록 3000쪽을 완강히 안 내놓고 있다"면서 "어떻게 이런 모습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냐, 권력에 기생한 간신배일 뿐이다"고 검찰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경제 살리겠다니 그런가 했는데... 속고 나서 후회하면 뭐하나"'도심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이충연 위원장은 재개발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호프집 사장님이었다.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경제를 살리고 국민들 잘살게 해주겠다니 그런가 보다 했다"면서 "속고 나서 후회하면 뭐 하냐"고 말했다.
남일당 건물 바로 뒤에 있던 레아 호프가 이충연씨 부부와 고 이상림씨 부부가 함께 장사를 하던 삶의 터전이다. 이 위원장은 "부모님이 저희 형제들을 다 키우신 장소이고, 오랫동안 정이 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고 이상림씨 부부는 27년 동안 '한강갈비' 가게를 운영했고, 그리고 2006년 10월 아들과 함께 레아 호프를 열었다.
가족은 리모델링 비용을 아끼기 위해 낡은 가게를 직접 수리했다. 예비 신부였던 정영신씨도 팔을 걷어붙이고 페인트 붓을 잡았다. 이들이 직접 만들었던 탁자가 지금 남일당 1층 분향소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