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적 비극] 정운찬의 인지부조화

등록 2009.09.09 16:04수정 2009.09.0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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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의 총리 입각을 두고 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MB의 불통 독주를 일부나마 해소할 수 있다는 나름의 역할론에서부터 변절자라는 낙인에 이르끼까지 다양한 진단이 나오고 있죠. 황석영 논란에서와 같이 기존에 알려진 이미지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주를 이룬다는 전례에 비추어볼 때, 이번 정운찬의 변신(?)과 그에 대한 반응은 다소 예외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논란의 내용이 비판적인 논조 일색이 아니라, 긍정에서 부정까지 다양하게 전개된다는 것 때문인데요, 그것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특히 진보진영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철회하지 못하는 심적 표출일 수도 있겠고, 또는 우석훈의 말마따나 정운찬의 여우 본색이 잘 발휘된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그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라 봅니다.

MB의 대운하사업을 반대하던 그에게 4대강사업에 대한 견해를 묻자, '수질 개선과 강 주변의 친환경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라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답변을 들으면서 부정에서 긍정으로 돌아선 그의 견해에 대해 희극적 넌센스를 느끼게 되는 걸 어찌할 수 없더군요. '수질 개선과 친환경 개발'은 대운하사업에서도 동일하게 내세우는 것인데, 그것과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운하사업에서의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고 4대강사업에서의 그것은 참일 가능성이 있다는 나름의 판단에서 그런 걸까요? 내세우는 주장은 양 사업에서 동일한데, 하나는 반대하고 다른 하나는 찬성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으니 이 무슨 희극적 발언이란 말인지요? 고개만 살짝 돌리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아수라백작'이라도 된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혹시 대운하사업과 4대강사업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업이라는 판단 때문일까요? 갑문 설치와 배를 띄운다는 얘기가 없으니 다르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몇 가지 요소가 빠졌다고 해서 본질마저 다르지는 않다는 것쯤은 정운찬 본인도 잘 알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굳이 '양자는 전혀 다른 사업이기 때문에 4대강사업에는 찬성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은 거겠죠.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가 '수질 개선과 친환경 개발이 이루어진다면'이라고 했는데, '이루어진다면'이 긍정을 내포하는 것인지 부정을 내포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하고' 찬성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이루기는 힘들지만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찬성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부정을 내포하는 거라면 나중에 가서 같잖은 핑계로 되돌아오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수질 개선과 친환경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하에 찬성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전제가 원래대로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때가 되면 그 말 역시 하나의 희극적 발언으로 기록되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일이 어디 한 두번 일어났어야 말이죠. 똑똑한 사람일수록 그런 희극적 넌센스에 빠지는 경향이 많기에 하는 말입니다.

행정복합도시에 관한 그의 언급은 조금 더 희극적인 것 같습니다. 개인의 생각은 전적으로 자유인 만큼 그가 어떤 의견을 가지든 그 내용상의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의아하게 생각되는 건 이런 것이죠. 행정복합도시에 관한 견해(의견)를 묻는 질문에 기껏 답변해 놓고는, 그에 관한 논란이 일자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닌데 너무 경솔했던 것 같다'라며 둘러칩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생각(견해)을 물은 것인데,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는 게 부적절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요? 그럼, 행정복합도시에 관한 당사자의 견해를 묻는 질문에 'MB는 좀 달리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다른 사람이나 정부의 의견을 말해야 한다는 건가요? 자신의 견해를 묻는 것에 대해 남의 견해로 답변하는 동문서답이 옳다는 것인데, 이 무슨 희극적 발언이란 말입니까? 그런 식의 발뺌은 본인 스스로가 소신 없음을 드러내는 반증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국민은 지금 자기 견해에 대한 소신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사람이 국가의 두 번째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한 진보진영의 일말의 기대는 아마도 헛된 기대가 될 공산이 커보입니다. 또한,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희극에 대한 웃음과 곧이어 뒤따르는 비극적 현실로 인해 또 한번의 허망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황석영, 정운찬 등 소위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이렇듯 희극적 비극을 심심치 않게 연출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 출발에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거창한 목표를 이루어 보겠다는 욕심,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는 욕심 등이죠.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인지부조화 과정을 거치면서 온갖 언변으로 자기합리화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똑똑할수록 핑계가 많고 애두른 표현과 모호한 언급이 많습니다. 제3자에게는 논리의 헛점이 많이 보입니다만, 정작 본인은 확신을 가지고 전진합니다. 이미 걸음을 떼고 자기합리화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발길을 돌려 되돌아온다는 건 거의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운찬은 지금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또 하나의 희극적 비극을 연출하면서 말이죠. 출발은 희극적 비극인데, 그 목적지에서는 과연 비극을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그건 전적으로 정운찬 본인의 몫일 것입니다.
#정운찬 #4대강사업 #희극적 비극 #인지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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